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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걸 꽁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7-09 11:48:43       조회수 : 430 파일 :

 

 

【 꽁 트】

純愛記

文化柳氏 忠/天安公宗中 總務 柳仁杰 儒州春秋 23輯 拔萃



대전역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열차가 도착하기 30분 전이다. 먼저 도착한 열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30분이면 상행, 하행 합쳐 이렇게 몇 번은 더 쏟아져 나와야 할 것 같다.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무료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하여 출영 인파에 섞여 계단을 오르다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를 잠시 회상했다.

정말 엊그제 같은 기억인데 무심한 세월은 어느새 50년이나 흘렀고 잊고 싶은 열적은 일까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곱게 포장되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옥희와 만난 건 기차통학을 하던 고교생 시절, 김천행 통근열차에서다. 대전에서 출발하여 김천까지 갔던 그 통근열차는 오후 6시에 출발하였다. 통근열차를 놓치면 통학생들은 차표를 따로 사야 했기 때문에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했다. 대전역이 시발역이라서 일찍 승차하면 열차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었다. 그날도 철식은 늘 하던 대로 열차에 올라 중간쯤 창가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는 플랫폼을 내려다. 보다 책을 꺼냈다. 대개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문제집을 풀곤 했다.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다가 문 앞쪽에 앉은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곤색 교복에 뾰족한 흰색칼라가 C여고생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슨 병이 있었는지 가끔씩 볼 때마다 늘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묻곤 괴로워하였다. 그날도 예상대로 많이 피곤해 보였다. 별로 가까이하는 친구도 없는지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보였다. 그녀가 밝은 모습으로 웃는 모습을 열차 안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

철식은 한참을 망설이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선반에 올려놓은 가방을 내려 그녀의 옆자리로 옮겼다. 그녀는 여전히 무릎에 가방을 올려놓고 엎드려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간 다시 고개를 파묻곤 하였다. 철식은 얼른밖에 나가 홍익회에서 물 한 컵을 얻어다 주었다.

"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이 물이라도.....""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물을 받아드는 작은 손이 참 예뻤다. 가느다란 손가락, 핏기 없는 얼굴, 약간 헝클어진 머리, 하얀 피부, 짙은 눈썹, 오똑한 코, 그리고 작은 입, 귀여운 인형 같았다. 물을 마시고 나서 정신이 좀 들었는지, 옆에 철식이 있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똑바로 앉아보려고 노력했다. 철식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말을 걸었다. "저 옥천에서 내리시지요?" "네? 아, 예 옥천이요. 그런데 제가 옥천에 내리는걸 어떻게.... "언젠가 옥천에서 내리시는걸 한 번 봤습나다." "저도 기차 안에서 뵌 적은 있는데..."

철식은 그녀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자신의 가방을 포개어 주고 엎드리게 해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묻고 고단한 몸을 두 개의 가방위에 맡겼다.

옥천은 대전에서 열차로 30분밖에 안 걸렸다. 열차에서 내리자 철식은 그녀의 가방을 들고 옆에서 걸었다. 가방 2개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부축을 해 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내를 기로질러 구읍으로 넘어가는 문정리 고개에서 잠시 쉬었다. 길가 상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함께 마셨다. 거기서부터는 띄엄띄엄 가로등이 있긴 하지만 길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한 손으로 부축을 했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질 때마다 온 몸이 전율했다. 긴장을 해서인지 두개의 가방을 들고 부축하며 가는 일이 힘이 들었는지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녀의 집은 교동리였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가 있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동네였다. 옥천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는 죽향초등학교를 지나 옥천 여중·고 쪽으로 접어들자 다시 길이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이젠 저 혼자 갈게요.""아, 예, 괜찮으시겠어요?" "그런데 집이 어디세요?" "추풍령입니다.""네? 저는 옥천인 줄 알았는데..... 어쩌지요?"“괜찮습니다. 다음 열차로 가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골목을 돌아 안보이고서도 한참 동안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그녀는 골목을 꺾어 돌아갈 때 잠시 고개를 돌리고 힘없이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곤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철식은 그 후 그녀의 동네 건너편 대성리에 사는 통학생 친구를 통해 그녀의 이름이 `옥희`라는 것과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늘 몸이 안 좋다는 것과 그런데도 공부는 잘한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열차 안에서 자주 만나게 되고, 그날처럼 옆 자리에 앉아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고, 둘이서 사귄다는 소문도 솔솔 번지려할 때 둘 다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식은 간부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하였고, 장교로 임관된 후 월남전에 자원하였었다. 옥희는 D시에 있는 보육대학에 진학을 하고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다 졸업 후 서울의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휴가를 나왔을 때, 그리고 파병되기 전, 몇 번 만났고, 편지도 자주 주고받았지만 월남에 가 있을 때는 서로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다. 이제 귀국하면 맨 먼저 옥희를 찾아가 청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작심하고 있을 때, 청천하늘의 날벼락 같은 옥희의 결혼 소식 편지를 받았다.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라는 것을 알고는 옥희에 대한 미련을 접기로 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옥희씨,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옥희씨를 생각할 때면 행복했습니다. 옥희씨가 결혼을 하신다는 편지를 읽고 종착역까지 가보지 않고 간이역에서 내리시려 하는 옥희씨가 참 야속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심이 옥희씨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저는 좋습니다. 분명히 저보다 좋은 분을 만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옥희씨가 그리울 때마다 우리 둘이 지내온 아름다웠던 시간을 들춰보며 길목마다 묻어 둔 이야기들을 꺼내 추억을 회상해 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먼 훗날 어디에선가 다시 만난다면 서로 마주보며 그냥 웃지요.` 그것이 끝이었다.

얼마 전 지리산으로 여행을 하다 어느 산골마을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렀다가 우연히 잡지에서 ‘純愛記`라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풋풋했던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글쓴이를 보고는 더 놀랐다. 시인 김옥희였다. `아, 시인이 되었구나.` 생각하니 정말 보고 싶었다. 칠순을 앞 둔 늙은이들인데 무에 그리 따질 게 있을까? 보고 싶으면 만나면 되지. 출판사로 전화를 해서 가까스로 김옥희 시인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서울행 열차의 도착 시간이 가까워지자 철식은 소년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도 그때처럼 여전히 가냘픈 몸매일까? `내가 연애의 밀당을 할 줄물랐어. 아니 용기가 없었어. 순진한 것이 아니라 바보였어. 우리 둘이 같이 살았으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생각은 그렇게 자유롭게 번져나갔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잊지 않고 간간이 그려보던 얼굴이라 금방 알아볼 것으로 생각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무리지어 오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 못 오는 건 아닐까? 나와 만나는 걸 남편이 알고 막은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앞으로 걸어가는데 저만큼서 전동휠체어를 탄 여인이 천천히 오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 반백의 생머리가 잘 어울렸다. 저런 몸으로 보호자도 없이 혼자 기차여행이라니.....`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그 여인이 말을 건넸다. "혹시, 철식씨가 아니신지요?" "아니, 옥희씨?" "네, 맞아요. 옥희....."

순간,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맞췄다. 철식도 옥희도 눈물이 핑 돌았다. 철식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는 옥희를 뜨겁게 포옹했다. 철식을 끌어안은 옥희의 가는 팔이 파르르 떨려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도 잠시 잊었다. 옥희가 먼저 철식을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옥희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둘은 택시를 타고 동학사로 향했다. 휠체어는 트렁크에 실었다. 매표소 앞에서 내려 철식이 휠체어를 밀었다. 아직은 고운물이 들지 않았지만 가을 내음이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동학사 절을 못가서 길옆에 숨어있는 전통찻집으로 들어갔다. 어둔 실내를 많은 촛불들이 밝히고 있었다. 철식은 옥희를 안아의자에 앉혔다. 서로 마주보며 차를 마실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그런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찻집에서 들은 옥희의 이야기는 철식을 서럽게 했다.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옥희는 역시 건강문제로 유치원 교사를 접고 어느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세상과 연을 끊고 살며 혼자서도 할 수 있는 詩作에 전념하여 시인이 되었고,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 야간대학에 다니며 공부를 하다 귀가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못쓰는 장애인이 되었단다. 누구의 아내가 되고 누구의 엄마가 되는 일은 자신에겐 사치라고 생각했었단다. 


`바보, 그것도 모르고. 행복하기를 빌었었구나.`
그때 왜 한 번 찾아볼 생각을 안했었는지 철식은 후회만 되었다. 사방에 켜놓은 촛불이 날름거리며 철식을 약 올리고 있었다.

둘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연스레 손을 마주잡았다. 50년 전에 잡았을 때처럼 그런 뜨거움은 아니지만 또 다른 뜨거움이 온 몸을 달궜다. 옥희는 지금도 역시 손가락이 가늘었다. 곤색 교복에 뾰족했던 흰색칼라의 인형같던 여학생 옥희가 여기있다.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버려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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