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봉과 위선

충경공(忠景公) 묘(墓)의 심봉(尋封)과 감찰(監察) 휘(諱) 광우공(匡宇公)의 위선(爲先)

(一) 序頭

本文에 앞서 먼저 忠景公의 祀孫系代 內容을 譜에 依하여 簡略히 살펴보면 長 典祀令公 諱 佐 다음으로 뒷날 그 5代孫(大丞公19世) 諱 元良(司果)께서 生2男하시니 長 諱 克恭(護軍)께서 生1男인 諱 範이었으나 后가 없이 下世하셨고, 次 諱 克儉(武科)의 7代孫인 諱 明涵(大丞公28世)公이 祀孫으로 系代 되었으나 뒷날 湖南으로 移居後 后도없이 일찍 下世하였으니 끝내는 忠景公 祀孫이 絶孫되고 祀板마저도 失傳되고 말았다. 以上으로 本論으로 돌아가 世上에는 崇祖爲先하셨는 분이 많기는 하나 個人 생각으로는 公께서 爲先하신 尺度는 그 누구도 따를만한 분이 달리 또 계실까! 公께서는 失墓狀態의 忠景公墓를 찾기 위하여 그 居所까지 他洞으로 옮기시며 政丞任墓가 約250余年의 긴 歲月동안 失墓로 계셨는데 많은 努力과 苦生 끝에 墓를 찾아 封築하고 各 小宗中에게도 通知하여 祭祀도 올리게 되고, 또 不足한 宗財擴充 및 齋室 建立에도 心血을 다하셨다 하니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崇祖爲先이라 하리요! 이보다 더 큰 爲先은 달리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뒷날(1800年4月)여러 地域 小宗中의 一部 宗員들이 큰 爲先하신 公을 오히려 甚한 貶害로서 “거짓으로 奪宗을 꾀했다”고 하며 官府에 訟事를 提起하고 그 公私文件을 忠景公 派譜 末尾에 登載했었는데 어려운 漢文이라 完全解讀이 어려워 大綱만 살펴보아도 그곳에는 公을 甚하게 卑下하고 또 貶害로 가득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公을 가르켜 그는 忠景公派도 아니면서 財物을 貪하여 後孫인 것처럼 詐稱했다 고, 甚한 酷評을 해 놓았다. 派祖任의 墓를 찾을려고 刻苦의 努力과 精誠으로 겨우 墓를 찾아 封築하고 宗中諸般事를 整理하여 祭祀까지 올리게 되고 또 不在中인 祀孫의 指名을 忠勳府에 上申하고 齋室建立도 推進하는 한편 宗物의 推尋確認등 爲先努力하신 內容으로 非難한 文件을 派譜에 까지 登載하면서 公을 甚하게 貶害했으니 一家분들께서는 혹시라도 잘못 傳해진 本 內容에 眩惑되지 마시기를 바라고 公의 崇祖爲先하신 顚末을 여기애 抄하여 여러분들의 參考가 되게하고, 또 公은 少尹公의 長子이신 天安公 諱 纁의 10代孫이심을 附記하여 分明한 忠景公 後孫임을 밝히는 바이다.

(二) 忠景公 墓

京畿道 南楊州市 鳥安面 時雨里의 鯨山 癸坐原에 계시는 文城府院君 諡忠景公 諱亮(高麗 恭愍王4年 乙未(1355年)12月22日~朝鮮 太宗16年 丙申(1416年)4月2日卒)의 墓가 約250年 동안이나 失墓 狀態였었는데 그 原因如何를 不問하고 全 文化柳氏中에서 가장 繁盛한 忠景公派인데 그 派祖님의 墓가 失墓 狀態였으니 後孫들의 不敏했던 罪를 어이할꼬! 무려 250餘年이란 기나긴 歲月인데 그 깊은 事由는 잘 알지 못하나 그동안 墓를 찾고자 努力도 하지 않았는지! 찾고자 했었다는 痕迹 하나 傳함이 없으니 이러고서도 大宗中이라고 자랑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에게 깊이 謝罪드리며 容恕를 비옵나이다.
그런데 그 中間에 壬辰倭亂이 있었기에 確實치는 않으나 그 情況으로 보아 根本原因은 아마도 乙巳사화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니 忠肅公(諱 灌)이 伸寃된 宣祖3年 庚午(1570年)以後에라도 墓를 찾았으야 만이 後孫된 道理라 할 것이나 結果는 그렇지 못하던 中, 晩時之歎은 있으나 公의 12代孫 監察公 諱 匡宇께서 墓를 찾아 封築했으니 얼마나 多幸이라 하리오!
本論에 앞서 派祖님 墓의 失墓와 깊은 緣이 있다고 할 수 있는 朝鮮時代의 四大士禍를 簡略히 살펴보기로 한다.

1) 戊午士禍(燕山君4年 戊午1498年)
士林으로 嶺南學派의 宗祖인 佔畢齋 金宗直(1431~1492年, 善山人)이 世祖가 端宗을 魯山君으로 降等하여 寧越로 廢黜하니 中國楚나라의 懹王에 比喩한 글인 弔義帝文을 지었는데 이를 그 弟子인 史官 金馹孫(1464~1498年)이 史草에 올렸다가 뒷날 柳子光(1448~1512年)이 이를 發見하고 王에게 告하므로서 많은 士林派 人士들이 賜死 또는 流配되었다.

2) 甲子士禍(燕山君10年 甲子1504年 一名 錦衫의피)
成宗의 妃이던 燕山君의 生母인 廢妃 尹氏의 賜死事實을 成宗의 嚴命으로 向後 100年 동안은 아무도 이를 發說치 말라고 했었으나 廢妃의 親母를 만난 任士洪(1445~1506年)이 이를 王에게 告하므로서 廢妃賜死 當時 이에 關與한 全員을 찾아내어 賜死 또는 流配시켰다.

3) 己卯士禍(中宗14年 己卯 1519年)
新進士類인 趙光祖(1482~1519年···諡文正公)가 中宗反正때의 功臣錄에 虛位功臣이 많음을 指摘하고 僞勳削除를 主張함에 잘못되면 功臣權을 잃게 될 危機에 몰린 勳舊派에서 趙光祖等 新進士類들을 除去하기 위하여 “走肖爲王”件을 造作하였으니 走肖는 趙의 破字라 逆謀와 같은 것이라고 몰아 부처 많은 士類人士가 被禍되었다.

4) 乙巳士禍(明宗 元年 乙巳1545年)
本 士禍는 忠景公墓의 失墓와 깊은 緣이 있고 보겠으니 仔細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中宗의 異腹兄弟인 仁宗과 明宗의 두 外戚들인 大尹派의 尹任(1487~1545年)과 少尹派의 尹元衡( ~1565年)과의 勢力 다툼에서 비롯된 士禍인데 當時 朝廷 重臣들 까지도 兩派로 갈려 서로 暗鬪까지하다가 仁宗이 卽位하니 大尹派가 得勢했는데 仁宗께서 在位 8個月 만에 昇遐하시니 그 뒤를 同生인 14世의 어린 明宗이 卽位하니 勢力은 反轉되어 少尹派가 得勢하게 되었다. 少尹派의 尹元衡을 爲始하여 李芭 (1476~1550年), 鄭順朋(1484~1548年), 林百齡(1498~1546年)等이 以前부터 宿憾이 있었던 當時의 左議政 柳灌(成宗15年 甲辰1484年正月7日生~明宗 乙巳1545年8月29日 賜死)을 爲始하여 都承旨 柳仁淑(1485~1545年···晉州后人)等 많은 名士들을 肅淸하기 위하여 虛僞로 逆謀事件을 造作하여 攝政人 文定王后에게 告變하니 그때까지 政勢에 밝지 못했던 文定王后께서는 少尹派들의 말만 듣고 大肅淸을 斷行하니 많은 重臣들이 賜死 또는 流配되었는데 特히 大丞公19世로 忠景公의 5代孫이신 左議政 松庵公 諱 灌께서 舒川의 流配地로 가는 途中 溫陽에서 賜藥을 받고 돌아가시니 당시 公은 62歲였다. 이로 말미암아 忠景公의 많은 後孫들이 士禍를 避하고자 各地로 흩으져 潛跡하므로서 그 後孫들이 살피지 못하는 忠景公 墓가 그만 失墓狀態가 되고 말았다.
그후 文定王后가 下世하신 뒤 各界에서 乙巳重臣들의 억울함을 伸寃해 드리고자 栗谷李珥(1536~1584년)先生의 41回에 達하는 箚子(차자~간략한 上疏文)와 休庵 白仁傑(1497~1579년)先生과 成均館 儒生 및 儒林에서 또 三司, 그리고 領議政 李浚慶(1499~1572년)等이 秦請하기를 “柳灌은 顧命大臣으로 忠誠을 다하여 政事에 正大하며 흔들림이 없었으니 원통함을 씼어야 합니다”고 하여 宣祖3年 庚午(1570年)에 伸寃傳旨가 내려지고 同10年 丁丑(1577年)에 官爵과 財産이 還給되었다, 뿐만 아니라 英祖22年 丙寅(1746年)公에게는 忠臣의 旌閭가 내려지고 아들 光纘(1516,9,15~1545,9,12紋殺)에게는 孝子, 그 配位 平山 申氏에게는 烈婦, 그리고 女婢 甲伊에게는 忠婢의 旌閭가 各 내려졌다. 또 英祖26年 庚午(1750年) 世子 左賓客인 趙觀彬의 諡狀에 依하여 忠肅公이란 諡號가 내려지고 또 뒷날 公은 中宗廟에 配享되었다.

(三) 大丞公 28世 監察公 諱 匡宇의 爲先

이와같은 士禍로 인하여 派祖의 墓가 約250年 동안이나 失墓狀態로 계셨는데 木川에 계시는 大丞公26世 諱 匡宇(英祖 戊午1738年10月28日生~ 純祖23年 癸未1823年5月21日 향년86세로 하세···少尹公後의 察訪公 諱 亨長의 9代孫이신데 뒷날에 後孫 貞烈께서 謹撰하신·監察 諱 匡宇公 墓表에서 “公은 山中 宰相이요 平地 神仙”이라 했다. 뒷날 公께서 失墓中인 派祖任의 墓를 찾기 위하여 百方으로 수소문 하시다가 派譜에 墓가 계셨다는 時雨峙로 居所까지 옮겨 그 마을의 訓長을 맡아보시며 時間이 있을 때 마다 周圍 산을 두루 踏査해보며 또 나무꾼들에게 물어보는 등 널리 探問한 끝에 正祖21年 丁巳1797年 드디어 墓를 찾아 새로히 封築하는 一方 松庵公의 9代孫 兵使 諱 文植公(丁卯1747,7,20~壬申1812,8,20卒)과 相議하고 協力하여 황패된 墓를 封築莎土하고 各地域 小宗中에게도 通文으로 알리고 宗中의 諸般事를 수습 정리하고 位土를 確認하는 等 精誠과 努力으로 同年10月7日 墓祀를 올리게 되고 齋室建立도 推進中에 兵使公이 北兵使로 轉勤가게 되어 그 아들인 諱汯(甲申1764,6,9~戊戌11838,8,5卒)이 代로 協力하며 宗事를 推進하고 또 忠勳府에 上申하여 嗣孫이 不在中이며 嗣板마저도 紛失되었으니 奉祀孫의 指名을 要請한바 忠勳府에서는 嗣孫이 나타날때 까지 申請者(匡宇)가 奉行하라는 指命에 따라 祭祀도 奉行하시고 여러 宗事들도 推進하셨다.

이와 같이 다른 一家分들은 吾不關輿로 無關心하여 아무런 動靜이 없었는데 公은 오직 崇祖와 爲先 一念으로 宗事處理등 큰일을 하심으로서 忠景公 宗中으로서는 가히 恩人 같은 분으로서 爲先중에도 가장 으뜸 爲先이라 勞苦의 慰勞와 尊敬을 받아야 마땅하신 분이신데 안타깝게도 민망하리 만큼 酷甚한 非難과 誹謗 攻擊 一邊倒로 잘못 표기된 文件이 있으니 正祖24年庚申(1800年)4月에 全羅道의 長城宗中을 비롯하여, 羅州宗中, 靈光宗中, 長水宗中, 그리고 木川宗中, 連山宗中等의 一部 宗人들이 訴를 提起하여 가로되
가) 木川의 匡宇가 敢히 宗家라 詐稱하고 山所를 守護한다고 하고 있다.
나) 匡宇는 本家부터 忠景公派가 아니다.
다) 匡宇는 賤한 出身이다.
라) 匡宇가 宗孫이라고 欺國罔上했다.
마) 匡宇가 宗孫이라고 속였다.
바) 그를 엄히 다스려 주소서 ····等等으로 송사를 提起하니 官廳과 서로 주고 받은 公私文件을 庚子派譜(1960年刊行) 文獻錄 末尾에 附錄하고 後日의 證憑으로 宗孫인 壎의 집에 保管한다고 했다.(뒷날 忠景公派大譜 卷之1(2003年刊行)494~503쪽에도 傳載해 놓았음) 그런데 그 文件中
1)敢히 宗家라 詐稱했다···고했으나, 이는 忠勳府의 命에 의한 것이라 (152~154쪽) 詐稱한 것이 아니다.
2)本來부터 忠景公派가 아니다···고 했으나, 公은 少尹公 後孫이니 忠景公派 가 分明하다,
3)賤孼(妾의 자식)이라 했으나, 公의 出身成分은 미처 알지 못하니 할말없음.
나머지 4), 5)항은 1), 2)各 項과 같은 내용이라 그에 準한다,
以上과 같은 內容으로 보아 個人所見은 가령 文件內容과 같이 若干의 잘못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約250年 동안이나 派祖의 墓가 失墓이던것을 刻苦의 努力 끝에 墓를 찾아 封築하고 祭祀도 올리게 되었음은 대단히 큰일을 하신것이라 혹시 若干의 작은 失手는 理解로서 감싸주어야 옳다고 하겠다.
더욱이 墓를 찾은 후 부터는 혼자 한 것도 아니며 兵使公 諱 文植 父子분과 같이 協力한 것이다.
이와 같이 一部項目은 實際事實과는 다른 것이다. 그 文件內容은 速斷이라 할 찌 모르겠으나 다분히 人身攻擊的인 심한 表記일 뿐만 아니라 이를 譜에까지 登載해놓았고 또 뒷날의 證憑으로 宗孫家에 保管한다고 했음은 참으로 祖上을 爲하고 宗中의 앞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多分히 感情的이였다고 보여 짐은 잘못한 判斷이라고 나무랄 수 있을까? 墓를 찾을때까지의 苦生도 많았으나 그 뒤로도 財源不足과 協力者도 한 두사람 뿐인듯 하니 그 어려움이야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더하여 約250年 동안이나 放置狀態로 황패되었을 墓를 封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 苦生하셨다고 慰勞를 해야 마땅하다 하겠거늘 訟事를 提起하여 甚한 侮辱的이고 人身攻擊的인 表記를 한 것은 常道를 벗어났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나 自身은 위와 같은 內容을 전혀 알지 못하다가 壬申1992年度 忠景公歲享에 처음으로 參祀하여 元老이신 諱基讚大夫任(天安公後···純宗 丁未1907年4月8日生)의 簡略한 說明으로 비로소 初步的인 內容만 들을 수 있었고 뒷날 丙申家乘(1956年刊行)과 庚子派譜文獻錄(1960年刊行) 및 甲寅大同譜文獻編(1974年刊行) 그리고 少尹公派譜總編(1992年刊行) 또 文化柳氏寶鑑(1990年刊行)等을 熟讀하므로써 以前까지는 미쳐 알지 못했던 事績등 宗事內容도 어느 程度 알수있게 되어 祖上任과 宗中을 爲하여 獻身的인 努力으로 남들이 하지 않았는 큰 일을 하신 監察 諱 匡宇公을 尊敬하고 欽慕하게 되었다.
그러나 不敏했던 탓으로 譜에서 傳해지는 것 以外는 全然 알 수 없었고 더욱 監察公宗中組織體가 있는지의 與否는 전혀 알지 못하던 중 지난 2012,5,19 少尹公墓 莎土工事現場에서 그 宗中 會長인 淸烈宗을 만나 주고받은 對話에서 組織體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혹시 지나친 간섭이라고 誤解받을까 두렵기는 하나 平素 公을 欽慕하고 尊敬해오던 마음에서 말씀드리는 것이니 理解하기를 바란다며 庚子派譜文獻錄 末尾에서 公의 位相과 名譽가 크게 毁損된 文件이 있어 안타까움이 많으니 그 文件中 公의 各 項을 條目條目따저 事實과 眞實을 밝히고 잘못 표기된 部分을 올바로 밝히는 反駁文을 宗譜에 發表하므로서 많은 분들이 그 眞實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더하여 忠景公宗中에도 널리 알려 줌으로서 혹시라도 본 訟事文件 內容이 事實인줄로 잘못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부 一家分들에게 까지 다들 誤解 없이 理解할수 있도록 널리 弘報하므로서 公의 名譽와 位相이 回復될 수 있도록 措處하고 努力함이 貴宗中이 最于先的으로 해야 할 最大 課題이며 急先務라고 對話했었다. 그래서 公의 名譽가 早速 回復되기를 빌며 이렇게 措處함이 貴宗中 組織體의 存在理由가 된다고 봅니다고 對話했었다. 以上으로 抄文을 줄이는바 懇切한 바램은 貴宗中의 끈질긴 努力으로 그간 失墜되었다고 보겠는 公의 位相과 名譽가 完全 回復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四) 公의 家系

公은 少尹公 諱 漢生後이신 大丞公25歲 通德郞 諱 浹(肅宗38年 壬辰1712年生~英祖52年 丙申 1776年 卒)의 長子로 英祖14年 戊午(1738)10月28日 天安의 木川에서 태어나시니 字는 汝仰이며 號는 晩隱이시고, 타고나신 天性이 仁厚하시고 孝友篤親하시니 鄕黨의 稱誦이 籍籍했으며 文章이 훌륭하여 뒷날 遺稿가 많았다고 한다. 오랜 뒷날 派祖이신 忠景公 墓가 失墓됨을 안타까워 하시더니 오랫동안 수소문하여 드디어 忠景公墓를 찾아 封築하여 不在中인 奉祀孫의 指名을 忠勳府에 上申하니 바로 公이 奉祀孫으로 差定받아 嗣孫代로 祭祀도 奉行하셨다.
朝廷에서 數次의 官職除授의 時典이 있은 뒤 純祖17年 丁丑(1817)에 通政大夫가 되시고, 그 다음해인 戊寅6月에 또 다시 僉知中樞府事에 加資되고 몇 년 뒤인 純祖23年 癸未(1823)5月21日 享年86으로 下世하시니 墓는 天原郡 城南面 大峙 先塋下 亥坐原인데 具石儀하다. 配位 安東金氏는 英祖13年 丁巳(1737)8月12日에 태어나시고 生三男2女하고 正祖21年 丁巳(1797)享年 61歲로 돌아가시니 墓는 公과 合祔하다. 譜에 依하면 親孫子가 9名이며 孫女가1名 있었으나 仔細한 內容은 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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