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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운병기서 번역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9-02 14:20:13       조회수 : 611 파일 :

 

 

반송운병기서 번역

2020년 류영석 발행

 

권 두 사

내가 어릴 때 우리집에 한문 선생님을 모셔놓고 한문을 배웠다. 그 후로 남달리 종사일에 관심을 가졌으며 충정공 판유공 반곡공 사직공 시향에 해마다 빠짐없이 다녔다. 그래서 반곡에 있는 반송을 잘 알고 있다. 당시 반송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려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어느곳 어디를가나 명승고적과 기관 절경이 많으며 기이한 나무들이 많다.그러나 허다한 나무중에 소나무는 나무중에 왕이요 반송은 소나무 중 왕이며 하나의 반송이 엉크러지고 서린것도 아니고 쌍반송이 하나의 반송처럼 서리고 엉크러짐을 보았을 때 참으로 나무중 왕이며 왕중의 왕이라고
높이 칭찬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반송이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석반동 산 五九-一의 부지 반계사와 약 이십여미터 간격을 두고 삼백여평 부지를 꽉 덮고 있었으며 두 나무가 십여미터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섰는데 옛부터 전하기를 자웅이라 하는바﹐ 숫반송은 약간 위에 똑바른 자세로 웅장하였고 암반송은 약간 아래쪽에 비스듬한 자세로 아담하고 아름다운 풍채를 지니었으며 두나무 둘레가 다같이 두아름 정도이고 키는 한질남짓 하였다. 두 나무가 얽히고 설키며 구부러지고 꺾이어서 사지가 사방으로 연하고 상하로 이어지고 동남의 사지가 합하고 서북의 가지가 서로 연결되고 구부러져 좌우의 가지를 분간할수 없고 전후의 사지를 헤아릴수도 없을만큼 이 천태만상의 괴이하고 특이한 모습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것인가. 흡사 여러마리의 용이 얽히고 설친 모습이랄까.참으로 특이한 반송이었다. 얼마나 특이하였던지 일본 고위 관리들이 보고 일본 황실 정원수로 만들고자 해가려고 별별 연구를 하다 한 그루도 아니고 두 그루인지라 옮기기가 너무나도 어려워 포기하였다고 전한다.
또 하나 명승고적을 두루 살피던 한 관광객이 이 반송을 보고 아아 이 솔은 천하의 기송중 기송이라 동양 여러나라의 소나무를 보아왔으나 이와같은 기송은 처음이라고 하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일본 정도의 신송과 우리나라 속리산의 정이 소나무 등 그 밖의 유명한 소나무를 보아왔으나 단 한가지 특색에 불과하였는데 이 반송이야말로 그에 비할수 없는 국보급이고 문화류씨 전체의 보물이고 자랑거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며,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려 다시 찾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천하의 기송이 一八六五년경부터 솔잎이 누렇게 마르고 고사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인간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하는바 하물며 우리 선조께서 손수 심으시고 애호하며 기른 것을 생각할 때 우리 후손들의 아픈 마음 금할 길 없다. 오호애재며 오호석재라 반곡공께서 심으신 천하의 기송 한쌍이 반천년을 지탱하다 죽었도다. 천지지간 만물중에 동식물을 막론하고 한번태어나면 한번 죽는 것은 만물의 이치이고 이를 어길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마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애석한지라. 불행중 천만 다행인지 쌍반송이 살았을 때 씨앗이 바람에 날려 약 이십여미터 떨어진 바위 틈에서 제二의 반송이 무럭무럭 자라온지 오십여년이 되었는지라. 이 또한 반곡공께서 끼친 음덕이 아직까지 다하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이제 이 제二의 반송이야말로 우리 류문의 큰 자랑거리이고 나아가 국가의 귀중한 보물이 될 것이다. 쌍반송운과 서문을 번역하여 이 책을 엮어내게된 동기는 내가 해마다 빠짐없이 반곡공 시향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실내서 서상을 살펴보았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서류중에 신도기 비품록 참제록 반곡공 사우건립에 관한 서류 경임안 반송계문부, 반송유제안, 묘제홀기,반송운병기서등을 발전하였으나 너무도 낡았고 구겨지고 이그러진 것을 새로이 정리하고 다듬어서 보관도록하고 제홀기는 시대에 따라 한글로 삼백여개 만들어서 배부하고 특히 반송운병기서는 반곡공 후손인 류기정 큰선비님을 비롯하여 전국 선비들이 一九O六년 五월에 운집하여 반송유제를 결성하면서 팔십여 선비들께서 반송을 찬양한 글이며 훌륭한 명시임을 알고는 이를 모른체 하고 사장할수 없어 책을 발간함에 원문을 앞에 넣고 번역문을 뒤에 넣었다. 나는 본래 단문하면서도 욕심이 많고 능력은 없으면서 무리하게 발간 하자니 번역이나 표현함에 부족함이 많은줄 알면서도 청주 홍준기 선생의 자문을 받아 이 책을 엮어내는 것이다.유인 즉 요즈음 한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어 그대로 두면 이 귀중한 책이 사장될까 염려함이요 또 하나는 우리 후손들이 이 책을 읽어보고 반곡공께서 심으신 쌍반송이 얼마나 특이한 솔이었는지 다시 말하자면 천하의 기승이었음을 알리고 또 하나는 반곡공께서 벼슬은 비록 현령에 불과하였으나 전국 선비들이 공의 높은 학식과 지조를 추앙하고 흠모하여 안의현 향교에서 해마다 배향하고 반석동 시제에도 매년 수백명씩 운집하여 향제를 성대하게 지냈으니 이 얼마나 우리 후손들의 큰 자랑이요 영광이 아니겠는가 이를 알면서 후손된 내가 이 책을 어찌 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신만고 끝에 엮어낸 것이니 잘못된 점이 많은줄 알고 있으나 반곡공 선조님의 숭고한 뜻을 되살리기 위함이니 널리 이해하고 숙독해 주기 바란다.


○ ○년 五월 五일

반곡공 一七대손 서경 류영석 근지

 



반곡공(盤谷公)과 쌍반송(雙盤松)



公의 휘는 적(績)이며 호는 반곡이시다. 문화류씨시조대승공차달(文化柳氏始祖大丞公車達)의 十六世손이며 충정공파조 대제학 좌명공신 문성부원군 우의정 시 충정공 휘량(大提學(佐命功臣 文城府院君 右議政、證 忠景公、諱 亮)의 손자요 한성판윤공 휘 정생(漢城判尹公 諱 京生)의 셋째 아들로 양주에서 태어났다.
자품(賢皇)이 온후하고 기우(氣宇)가 총명하여 一四九二년 이조 성종 二三년 임자문과시(五子文科試)에서 을과(乙科)에 올라 一四九四년에 진위현령(振威縣令)으로 부임 선정(善政)을 펼쳐 이속(吏屬)들은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니 백성들은 어진 수령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중년에 연산정란(燕山政亂)으로 시국이 날로 어지럽자 곧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여 진위현령직을 그만두고 넷째 아들 순손(順孫)을 호군(護軍)으로 앞세우고 남쪽 경상도 함양 안의 석반동에 도착하자 이 곳이 머물 마땅한 곳이라 여져 공은 여기서 세상을 등지고 임천(林泉)에 덕을 기르며 독서로만 전거(奠居)하여 무오의 화를 면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조정에서 어떠한 직책의권유도 물리쳤다.
그리고 반송 두 그루를 손수 식수한 것이 세월이 갈수록 그 바탕이 크고 반송본연의 작태가 하늘을 덮어씨운 듯 너무 아름다움과 위엄이 널리 알려져 내려오면서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낳게 하였다.
전국의 사림(士林)또는 유림(儒林)들이 이곳을 찾아들어 서로가 벗을 삼고 반송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문장실력도 겨루면서 모임도 하고 공의 후손들과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 반제사(盤溪池)에서 춘추로 모여 수년전만 하여도 사당제례(祠堂祭禮)를 봉사하여 왔다.
근간에 동양재에서 반곡공과 반송을 칭송하는 시문(詩文)들을 정리하든 반곡공의 一七대손 영석(瑩奭)손이 공의 음덕을 기리고 그 반송의 아름다움과 특이함을 재조명할 수 있는 문집을 발간하여 널리 배포 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미력하나마 본인도 지지할 뜻을 밝혔다.
반송을 식수한지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그 아름다움과 위엄은 자취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후손들이 뜻을 모아 반곡공을 기리는 풍장백세수비(風長百世竪碑)를 二○○三년 八월에 봉헌하였으며 공의 음덕은 대대손손 청복(淸福)으로 영원 할 것이다.

二○○년 五월 五 일

盤谷公十五代孫竹浦 柳吉洙 謹選 

 

 

반송유계서 




천하에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행지지고 있는 제의 종류를 말해보면 동호인간의 친목제 친구들 또는 동창간의 친목제 어느 목적을 위한 계, 조상을 위한 숭조목종의 제등, 제의 종류도 많고 다양하지만, 여기에서 쓰고자 하는 계는 내 나이 七세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한 나무를 기리기 위한 계란 참으로 희귀한 일이아니겠는가. 더구나 一九O六년 당시 최고의 지식층인 선비들이 그것도 어느 지역에 국한된것도 아니고 전국에서 하나의 성씨만도 아니고 전체의 성씨들 선비들이 이 반송을 보호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하나의 계 모임을 결성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전극을 막론하고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 천하의 기송을 보호하기 위하여 계모임이 당연하다 하였겠지만 이외에 하나의 이유가 더있다. 우리 선조 반곡공께서 심으시고 애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곡공은 어떤분이기에 그토록 우러러 보고 흠모하였을까? 반곡공께선 좌명공신 우의정 휘량의 손이고,한성판윤 휘 정생의 삼남으로 태어나 一四九二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一四九四년에 진위현령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푸시고 一四九八년 무오사화의 부당함을 상소한 후 벼슬을 사직하고낙향하시었다. 당시 진위백성들이 친부모를 보내는 것 같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석반동에서 사자 순손과 같이 살면서 마을입구에 문화류씨를 상징하는 왕버드나무를 심고 짐좌측에 신비의 산재를 상징하는 쌍반송을 심고 우측 높은 바위에 앉아 반곡이라 자호하고 세상을 등시고 학문에 열중하며 여생을 지내셨다. 당시 영의정 류순이 공의 높은 학문과 애민제세할능력을 갖는 분임을 알고 수치 관직에 나아갈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까지 고사하시었다. 이와같이 높은 벼슬을 제수함에도 고사하고 무고와 탐욕이 난무하는 홍진을 피해 유유자적 학문에만 예상하고 후진양성에 힘쓰시었다.
봉황이 하늘에 높이 날미며 오동이 아니면 깃들이지 아니하는도다. 선비가 학문을 연마함이여 명이 아니면 의지 아니하리로다. 이 어찌 백이와 늑대에 뒤지겠는가. 공교롭게도 공의 에이 시바시 안하였음인시 반송이 고사하기한 이십여미터 떨어진 바위틈에 씨앗이 떨이에 그의 발이 무럭무럭 시리고 있다. 참으로 천우신조랄까? 이 제드의 반송이야말로사이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합격으로 살펴보건데 천하의 기송 쌍반송과 절이에 사이 이 곡에서 애호하신 반송이기 때문에 전국 선비들께서 『반송유계]를 결성하였음이리라.

○ ○년 五월 五일

반곡공 一七대손 서경 류 영 석 근지



반곡공(적) 사적



공은 경기도 양주에서 한성판윤 휘 영생과 의정부 영의정 하연의 따님 하씨와의 사이에 五남三녀중 三남으로 태어나셨다. 공의 조부는 충정공 의정부 우의정 휘 량이시며 증조는 밀직부사 영의정 문화군 휘 계조이며 고조는 밀직대언 휘 보발이시다.
공의 큰형은 송화현감 찬이시며, 작은형은 회양부사 혜이며, 동생은 사정집과 사직 진 五형제이다. 공은 혁혁한 공신의 가문에서 태어나 충효가 근본이 되고 기상이 되어 일찍부터 명성을 떨치셨으며 자름이 온후하고 기우가 총명하여 당대 최고의 사대부인 외조부 의정부 영의정 하연의 집에서 기초 학문을 배우고 성종 二三년(一四九二)문과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하며 학문 높은 선비들과 교류하셨다.
공은 연산군 초 一四九四년에 경기도 진위 현령(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으로 부임하여 정령을 엄정히 하고 명백히 행하여 선정을 베푸니 모든 관리들은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고 고을 백성들은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여 모두 어진 수령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연산군 四년 (一四九八년) 무오사화 때 동문 수학한 종친 류순 형조참판이 파직되고 많은 사대부와 선비들이 화를 당하거나 귀양 가는 것을 보시고﹐ 장차 더 큰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시고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안음 석반동(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석반동)으로 낙향하셨다. 낙향시 많은 진위 고을 백성들이 친부모를 보내는 것과 같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공은 좌랑으로 재임시 조선 三OO여 고을의 자연 인문 지리를 담은 여지도서 발간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졌다. 전주대학교 변주승교수 등 한국사 전공자 10여명의 연구팀이 여지도서에 대하여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二○○二년 五월부터 七년동안 작업 끝에 번역을 마쳤는데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 지역향토사 연구를 한단계 끌어올리고 국문학 등 인접 학문과 문화 관광 사업 등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였다.
배위는 숙인 서원 이씨이며, 목사 이길의 따님이며 좌의정 이거이의 손녀이시다. 슬하에 五 형제를 두셨으니, 공이 낙향시 장남 사직 효손은 경남 합천으로﹐ 차남인 사직 효남은 전라도 함열로, 三남 효제는 무후하였으며, 따남 호군 순손은 공과 함께 함양으로 五남 정손은 진사로서 감찰과 사직을 지냈는데, 경남 거창으로 입향하여 후손들이 경남 전북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공의 후손들이 五OO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려온 화수제로 매년 모임을 가져 친목을 다지고 있다.
공은 석반동에 四자 순손을 데리고 아늑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한 곳에 터를 잡아 살면서 집 좌측에 반송을 심고, 우측에 있는 높고 큰 바위에 앉아 반곡이라 자호하고 조용히 여생을 즐기며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반복되는 사화를 보시고 후손들에게 높은 벼슬에 나가지 못하도록 유언을 하셨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하여 중종반정이 일어난 그 후 의정부 영의정 류순이 공의 높은 학문과 능력을 인정하여 수차 높은 관직으로 불렀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영의정 류순을 위시한 반정 공신들이 나라의 큰 인재를 잃었다고 아까워 하였으며, 맑고 높은 지조는 길이길이 빛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석반동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심은 반송은 공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 청룡 황룡이 너로 감아있는 십자형상으로 동쪽 줄기는 장남 효손과 남 정손이 살고있는 경남 합천 서창 쪽으로﹐ 서쪽 줄기는 차남 호남이 살고있는 전북 함열 쪽으로, 남쪽 줄기는 동생 집과 진이 살고 있는 전남 곡성 쪽으로, 북쪽 줄기는 고향인 서을로 향하고 있었다. 공이 심어놓은 반송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최고의 명물이었는데 일제 때 일본인이 일본에서는 그런 반송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왕실의 정원수로 가지고 가려고 수차례 이식을 추진하다 실패하였다. 오호라 모든 생명이 붙어있는 동식물은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는다는 원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지라 반천년을 이리 이어오다 애석하게도 천하의 기송이 수명이 다 되어 현재는 밑중치만 남아있다. 다행히 반송의 수명이 다 되기 전 반송의 씨가 공이 앉아 여생을 보낸 큰 바위 정상 좁은 틈 사이로 날아 들어가 제二의 반송이 현재 자라고 있는데, 공이 심었던 반송과 똑같아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로 지정받이 보호해야 된다고 하고 있으며, 후손들의 번창을 뜻하는 길송이라고도 하고 있다.

내가 외람되이 후손으로서 공의 사적을 자세히 알기 때문에 대략을 서술하여 후일에
상논하는 이의 채택을 기다리노라,


서기 二0二0년 五월 五일

반곡공 一七대손 문화류씨 대종회 고문 류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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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선사 선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