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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선사 선유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18 16:39:44       조회수 : 681 파일 :

 

 

 

【금호선사선유도】

 

대구가 놓치고 있는 대구 인문학사의 키워드 1



글·송은석 (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우리 대구는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탓에 배를 보거나 한 번 타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기껏해야 수성못이나 동촌유원지에서 오리배 한 번 타보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배를 접하기가 어려웠을까?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대구를 동·서로 양분하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신천은 북구 침산동 일대에서 금호강과 합류한다. 이 금호강은 다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교일대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대구는 금호강과 신천이라는 물길을 통해 낙동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천(新川)은 말 그대로 강이 아닌 내(川)이다. 상류에 가창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금보다는 수량이 풍부했다고는 하지만 배를 띄울만한 상황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호강은 전혀 다르다. 영천군. 청송군 포항시의 접경부인 보현산과 도덕산에서 발원한 금호강은 영천과 대구를 관통하여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낙동강의 대지류이다. 강의 전체 길이가 116km에 달하는데 우리 대구권역을 통과하는 강의 길이만 해도 거의 40km에 이르며, 강폭도 평균 300m 정도가 되는 큰 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금호강은 우리 대구지역에 있어 중요한 수운교통망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과거 금호강에는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복현 나루 검단나루·동변나루 무태나루·조야나루 노곡나루 팔달나루 금호나루 해랑개 달천나루 이천나루 선사나루 강창나루 강정나루` 등인데 그야말로 대구는 나루터의 천국이라 할 만 했다.

한편 우리지역의 유학자들에게 있어 이 금호강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의의를 지닌 강이었다. 바로 `누정(樓亭)문화·구곡(九曲)문화·선유(船遊)문화`가 그것이었다. 누정문화는 산수를 겸비한 절경지에 많은 누정이 세워져 그 누정을 매개로 하는 인문학적 문화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구곡문화는 산수의 경치가 빼어난 지역을 배경으로 특별히 9곳의 절경을 선정하고 그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는 문화유형을 이르는 것이다. 끝으로 선유문화는 말 그대로 뱃놀이(?)를 뜻한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금호강을 배경으로 행해진 우리 대구지역의 선유문화에 대해 이야기이다. 

 

1. 금호강 선사 일대에서 행한 선유의 다큐멘터리 기록

「금호선사 선유도 (琴湖仙査 船遊圖)」는 지난 1992년 세상에 알려진 것으로 시서화가 삼위일체를 이룬 독특한 작품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13년 전인 1601년(선조34), 대구의 금호강 선사 일대에서 진행된 선상(船上) 시회(詩會)를 시와 그림 그리고 글로 한 폭의 종이 위에 표현한 것이다.

금호선사선유도는 한말 영남의 큰 선비 임재 서찬규(1825-1909)의 현손인 서대규씨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선유도는 4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탓에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4개월에 걸친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조선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임란의병장이었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 선생은 난이 끝나자 고향인 금호강가 이천리 선사에 완락재(玩樂齋)」라는 서재를 건립했다. 금호선사선유는 바로 이 완락재 낙성일 날 거행된 지역 선비들의 낙성축하 뱃놀이 겸 시회였던 것이다. 1601년 3월 23일 행해진 이 선유에는 좌장인 낙재 서사원을 비롯해 감호 여대로 여헌 장현광 등 모두 23명의 선비들이 참석했다. 이날의 선상 시회는 주자의 시 「어정시(漁艇詩)」를 차운해 각각 시를 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선유도에는 이날 참석한 23명의 명단이 제일 상단의 [금호선 사선유도」라는 제목 바로 아래에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에는 각기 해당 인물들이 지은 시가 기록되어 있다. 시 아래에는 금호 선사선유를 묘사한 조형규(趙衡達)의 그림이 있으며, 맨 아래에는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1552-1619)가 찬한 서문(序文)이 묵서되어 있다. 참고로 원본은 가로 127cm 세로 85.3cm 크기의 한지이다.


2. 대구가 모르고 있는 「금호선사선유도」의 가치와 의의

[금호선사선유도」는 우리지역에서 행해진 선유문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큰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이름난 선유들 중에 이 [금호선사선유]가 당당히 포함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선유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금호 선사선유도의 가치와 의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문학사적 가치

[금호선사선유도」에는 그림 외에도 시(詩)와 서(書)가 함께 등재되어 있다. 시의 경우는 주자의 「무이정사잡영 중 하나인 [어정시(漁艇詩)」 5언절구를 차운한 것으로 모두 15수이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어정시] 5언절구의 20글자 모두를 분자분운(分字分韻)하였다는 점이다. 어정시 첫 구인 `출재장연(出載長烟)`을 예로 들면 서사원은 `출`, 여대로는 `재`, 장현광은 `장`, 이천배는 `연`을 운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나머지 구절도 이런 방식으로 분자분운을 했는데 모두 나이순을 기준으로 했다. 이처럼 5언절구 20글자 전체를 차운하는 방식의 차운시(次韻詩)는 지금까지 금호선사선유시가 유일하다고 한다.

회화사적 가치

이 작품은 겸재화풍에 충실한 작품으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였으며, 암벽 면과 질감을 나타내고 편주[조각배]를 그려 넣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유행한 겸재화풍을 살펴볼 수 있다는 회화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그림의 말미에는 「계사중춘지 일후생난파조형규관수근화(癸巳仲春之 日後生蘭坡趙衡逵盥手謹畵」라 쓰인 낙관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계사년이 정확히 언제를 지칭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화풍이 조선후기 유행한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지질(紙質), 관련 문집들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이 선유도는 순조 계사년, 즉 1833년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유문화사적 가치

선비들이 행한 선유문화는 일반적인 뱃놀이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선비들의 선유는 지역 학파 문중등을 연고로 한 사교의 장이자 학술토론의 장이었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광범위하게 행해진 선비들의 선유는 `누정문화`와 함께 `선유문화`라는 한 장르를 개척했다. 우리나라에는 퇴계의 `풍월담 탁영담 선유`와 한강의 `용화선유 봉산욕행` 등과 같은 이름난 선유들이 있다. 「금호선 사선유도」는 금호선 사선유가 이들 유명 선유와 어깨를 나란히 함은 물론 우리지역 선유문화의 전형을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유학사적 가치

16c말-17c초 우리 대구지역의 유학은 한강 정구를 정점에 두고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양선생에 의해 전성기를 걷고 있던 시기이다. 또한 인근 선산의 여헌 장현광과도 교류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 대구의 유풍은 `한강학파` 중심에 `여헌학파`가 함께 공존하는 시기였다. 대구의 사학(私學)은 북구 연경동의 `연경서원`을 정점으로 하여 동부권역은 황금동에 자리한 손처눌의 `영모당`이, 서부권역은 서사원의 이천리`완락재`가 단연 으뜸이었다. 금호선 사선유는 바로 이 완락재 낙성을 축하하는 선유로 당시 참석자 23명은 `한강학맥·여헌학맥 낙재학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금호선사선유도는 17c초 우리지역유학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하겠다.

유학자들의 또 다른 학문·교류의 장, 선유문화


옛 선비들은 학문을 하는 틈틈이 산에서는 `유산(遊山)`을 즐겼고 강에서는 `선유`를 즐겼다. `선유(船遊)`는 말 그대로 뱃놀이를 말한다. 그런데 선비들이 즐긴 뱃놀이는 일반적인 뱃놀이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달랐다. 지인들 몇이서 배를 함께 타고 강을 오르내리며 선상에서 시문을 짓거나 학문을 논하는 식이었다.

우리 대구 특히 성서 다사지역은 가까이 와룡산·마천산·금호강·낙동강을 끼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예로부터 누정(樓亭)문화와 선유문화가 있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서거정은 「대구십경」을 노래하면서 금호강의 뱃놀이를 그 첫 번째로 노래하였는데 `금호범주(琴湖泛舟)`가 바로 그것이다.

대구권역의 금호강과 낙동강 변에는 `영벽정·하목정·아금정·부강정 선사재·이락서당 ·이강서원 사양정사·환성정·압로정` 등의 많은 누정이 있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성서 다사지역에 있다. 이는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라는 지리적 특수성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누정문화는 이러한 누정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정적인 성격의 학문과 풍류의 장이라면, 선유문화는 동적인 성격의 학문교류의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호선사선유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옛 선비들은 선유를 행할 때마다 `선유록(船遊錄)`을 남겼다. 이 선유록에는 참석자의 신상정보는 물론 선상에서 지은 시와 선유와 관련된 일지형식의 메모 등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 선유록 관련한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 배에 기생 또는 여자가 함께 탔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옛 선비들이 행한 선유문화는 향락을 추구하는 그러한 유형의 뱃놀이는 분명 아니었다.

중국의 경우는 적벽부로 대표되는 소동파의 선유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퇴계의 `풍월담 탁영담` 선유와 한강의 `용화선유·봉산욕행` 등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이름난 선유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우리지역의 선유문화가 있었으니 바로 [금호선 사선유」이다. 참고로 우리지역의 금호강과 낙동강 수계에서 행해졌던 선유와 관련된 누정들을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금호강: 압로정(押鷺亭·송담 채응린 무태)→환성정(喚性亭·태암 이주·무태) → 선사재·이강서원(仙査齋·伊江書院 낙재 서사원·이천리) → 이락서당(伊洛書堂 9門30人·강창)

낙동강: 하목정(霞鶩亭·낙포 이종문 하산) → 영벽정(映碧亭 아암 윤인협·문산)→ 아

암 윤인협.문산) 아금정牙琴亭(洛涯 鄭光天·매곡) → 부강정(浮江亭·생원 윤대승·죽곡)


[금호선사선유도] 맨 하단에는 감호 여대로 선생이 찬한 [금호선 사선유서문」이 적혀 있다. 당시 여대로의 나이는 50세로 52세였던 서사원 다음으로 연장자였다. 이 서문은 21세의 최연소자로서 금호선 사선유에 참석했던 김극명의 요청으로 여대로가 지은 것이다. 금호선 사선유의 좌장이었던 서사원의 이천 별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서문은 선사의 내력과 풍경, 시회의 모습, 사우(師友)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에 대한 소회와 헤어짐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천(伊川) 별장에 행보[서사원]가 거처하였다. 행보데, 그 땅이 비록 아주 먼 곳에 치우쳐 있다고 할지라도 하늘이 이 별장을 점지해주시니 그 이치가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천 강물이 그치지 않고 치렁치렁 활기차게 흘러내려 낙동강 물과 합치되는 곳, 이 어찌 이락(伊洛) 두 물이 한 곳에 모여 행보의 자기 분수에 맞는 자연물을 이루었는고, 덕회[장현광]는 행보에겐 뜻이 같은 벗이다. 그에 맞추어 덕회가 옥산에서 여기에 옴에야 따라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모두 기약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주자의 무이 뱃노래의 흥을 그리면서 선주(仙舟)를 선사 옛 절에서 뱃줄을 풀고 띄웠으니, 그 한 절간은 유선(儒仙) 최치원이 옛날 놀던 곳이므로, 실로 방불하게도 나뭇꾼이 신선놀음(바둑구경)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 난가의 옛 자취가 어릴법도 한 곳이다. 이 날에사 가랑비 내리다 이내 활짝 개이니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물속에 거닐고, 낭떠러지의 꽃과 물가의 능수버들의 붉고 푸름이 강물 속에 비추며, 십리까지 이어 있는 비단병풍인양 아름다운 풍경미가 모두 한 거울 속 별천지를 이룩하고야, 사미(四美)와 이난(二難)이 한때에 갖추었으니 인간 세상 백년간에 한갓 다행스럽고 훌륭한 일이로다. 저 층층이 쌓인 기이한 바위, 아득히 펼쳐진 모래벌이야 말로 신묘한 화필이 아니고서야 그 스펙터클의 조화진경을 그려낼 수 있으랴. 

날이 저물어지자 배를 부강정에 대니, 이 정자는 윤진사 대승이 지은 것으로 대마루 기와는 병화입어 불 타 버렸고, 윤진사가 이 세상의 인연을 다한 지 10년도 채 못 되었건마는 거치른 집이 다만 저녁 비에 젖어있고, 송죽의 그림자가 텅 빈 뜰에 서로 얽혀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또한 산양(山陽)의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구나. 강촌에 어둠이 다가오자 정사에서 투숙하고자 하였으나, 방이 몇칸 안 되어 일행들은 다 잘 수가 없기에, 나와 사빈[이규문]은 돌아와서 학가(이종문)의 집에서 잤다. 날이 밝아지자 제현들이 추후로 연이어 모였다. 새벽구름이 비를 빚어 적삼을 축축이 젖게 하였으나, 펄펄 경쾌함이야 우의(羽衣·신선의 옷) 신선이 허공을 훨훨 나는 듯하구나. 배안에서 주회암[주희]의 무이오절인 출재장연중 등의 20자를 공운(公韻)으로 삼으니, 제현이 다투어 시 짓고 읊었으나, 다만 이진사 학가만이 도리원에 앉아 시를 짓지 못하여 벌주 3배를 마셨는데, 이것은 이태백의 춘야도리원서에서 시를 짓지 못하면 그 벌은 금곡주주(金谷酒壽)에 의한 고사에 따랐다. 덕회는 `장`자를 얻어 시를 짓되, 시구를 다듬지 않았고, 나도 여러 사람의 윽박지름을 못 이겨 부득이 훌륭한 글귀 뒤에 보잘 것 없는 시를 끝에 부치고서 마침내 서로 껄껄 웃으면서 마쳤다.

이별의 한을 재촉하나 여정은 그지없고 사람의 그림자가 서로 나누어질 때, 해도 이미 서산에 걸렸다. 꽃다운 자취를 펼쳐 이룬 이 좋은 모임도 꿈만 같구려. 어제 일을 되돌아 생각해보니, 이 이별이 애석하여 문득 슬플 뿐, 아 십년 난리 속에 몇 사람이나 살았는고, 비록 혹은 살았다 해도 같이 만난 사람이 또한 몇이나 되리. 진실로 마음에서 만나기를 기약한 이가 있으면, 대개는 조화옹이 마귀의 훼방을 입어 그 사람을 세상에 살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모임을 이룸이야 더욱 어렵거늘 이제 아무 꾀함도 없이 23인이 한데 모였다는 것은 어찌 인력으로써 능히 할 수 있으랴. 그 모임 숫자도 그사이 누가 그렇게 시켰는지 알 수가 없다.

본래부터 이합(離合)이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만나니, 만나고 헤어짐이 하늘의 처분이 아님이 없는 즉 다른 해 다른 날에 이 몸이 또 어디에서 모일지 모르겠구나. 그 모임이 꼭 가능하다고 볼 수도 없고, 비록 모임을 가진다 해도 모두 다 모일 수도 없을 지니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모임을 그리워함이 또한 오늘 사람들이 옛사람의 모임을 그리워함과 같음을 어찌 알겠는가. 진실로 슬플시고!

이에 김극명 수재가 이 좋은 일이 인멸될까 저어하면서 그 면목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나에게 서문을 청하므로, 불문이나마 구태어 고사하지 못하고 이 서문을 짓는다.

신축(1601) 늦은 봄 3월 23일 성산 후학(後學) 감호(鑑湖) 조도(釣徒) 여대로(呂大老) 서(序) 

 

에필로그

[금호선 사선유도」는 살펴본 바대로 금호강의 선사 일대에서 행한 선유에 대한 `시·서·화를 한 폭의 종이 위에 남긴 기록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즈음에 아마도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 같은 내용 하나만 마지막으로 살펴보자. 바로 「금호선사선유도」라는 제목 말이다.

`금호강(琴湖江)`이라는 강 이름의 유래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바람이 불면 강변의 갈대밭에서 거문고(琴) 소리가 나고 호수처럼 물이 맑고 잔잔하다`

이처럼 금호(琴湖)는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잔잔한 호수`를 의미한다. 특히 100km가 넘는 금호강 전체 물줄기 중 가장 하류, 지금의 강창 일대의 금호강을 일러 유독 `금호(琴湖)`라 칭했다. 이는 금호강이 이 일대에 이르러 비로소 낙동강과 합류하는 탓에 수면의 넓고 잔잔함이 가장 심했기 때문이었다.

`선사(仙桂·仙査)`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큰 뗏목을 이르는 말이다. 요임금 시절 12년을 주기로 하늘을 한번 운행하는 거대한 뗏목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 뗏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사는 인간의 안목으로 논할 수 있는 뗏목은 아닌 것이다.

금호선 사선유는 임진·정유 양란이 끝난 직후인 1601년 봄에 행해졌다. 서문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임진. 정유의 양난에서 살아남은 우리 대구의 선비들이 스승을 중심으로 강학소를 재건하고, 유풍이 다시 일어나기를 다짐하는 성격의 모임이었을 수도 있다. 마치 요즘의 동창회처럼 말이다.

당시 선유에 참석한 23명의 선비들이 탄 배는 작은 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유의 제목만큼은 참으로 창대하게 뽑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13년 전인 1601년 3월 23일, 선사나루를 출발한 편주(조각배)는 우주를 배경으로 운행하는 선사의 큰 꿈을 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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