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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천리 역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11 10:13:29       조회수 : 514 파일 :

 

 

 

 방천리(坊川里), 박실원(朴實院), 원마(院村)



1) 마을의 자연환경(自然環境)


마을 뒤로 와룡산(臥龍山: 높이 299m로 용이 누운 형국이라 함)이 있고, 금호강(琴湖江)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원마(院村), 이반(李班), 중마(中村), 아래마, 마천(馬川) 등 자연 부락이 산재해 있고, 방천(坊川)에는 경부본선철교(京釜本線鐵橋:多斯八景中 第六景)가 230m로 서남쪽에 있다. 다사 쓰레기 매립장이 이곳에 있어 당국과마찰이 심하다.


2) 마을의 역사(歷史)


본래 대구부(大邱府) 하동면(河東面)의 지역으로서 원마(院村)는 방천리에서 가장 큰마을인데 조선때 행인의 편리를 도와주는 박실원(朴實院)이 있었기 때문에 박실원이라고부르며 안마(李班)는 1557년 선조때 유희상(柳希祥)이라는 선비가 입향(入鄕)하여 유씨(柳氏)마을을 이루었다하여 유반(柳班)이라 부르다가 이반(李班)이라 개칭하고 있으며,또 원마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안마라고도 하며, 중마는 방천리 전체의 가운데 위치하므로 중마라하며, 아랫마는 원마의 아랫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아랫마라 부르고, 방천은 마을앞에 있는 산 밑을 흐르는 내의 제방이 견고하게 잘 막아져 있다하여 방천리라 하는데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방천동이라하여 달성군 다사면에 편입되었다.



3) 성씨별 가구분포(姓氏別 家口分布)

총 81가구중 문화유씨(文化柳氏) 59가구, 기타 22가구로 구성돼 있다.


4) 전설(傳說)

○ 와룡산(臥龍山)의 전설

와룡산은 방천동(坊川洞), 서제동(鋤齊洞)과 달서구 성서(城西)의 죽전(竹田), 신당(新唐), 용산(龍山), 파산(巴山) 파호동(巴湖洞) 상리동(上里洞) 등과 접해 있는 산이다.그런데 이 산과 다른 산 셋을 합해서 보면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자세이기에 와룡산이라 명명하였지만 실은 용의 머리 부분만을 와룡산이라고 주민들은 일컫는다. 이 용머리 부분인 와룡산 꼭대기에 무덤을 쓰면 그 묘주인은 큰 부자가 되지만 그 일대에는 무덤이 있는동안은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있어서 가뭄이 극심하면 이곳 농민들은 와룡산에 올라 송장을찾아서 불태운다. 일제말엽에도 가뭄이 극심하여 농민들이 와룡산 꼬대기에 올라 송장을찾아서 불에 태워 버리고 내려오자 구름 한점 없었던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고 천둥이치더니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 바위(嚴)에 얽힌 전설

방천리 입구 동(東) 서(西) 북(北)쪽에는 요소(要所) 마다 커다란 바위가 있어 행인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바위들은 먼 옛날에는 다섯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중 동쪽에 있는것이 모실바위(迎賓嚴)로서 이것은 경부선철도(京釜線鐵道) 설치 때 없어지고, 지금은 검문암(檢問巖), 초소암(哨所巖), 신령암(神靈巖), 장군암(將軍巖) 등 네 개만 남아있다. 그 밖에도 와룡산에는 병풍(屛風) 바위, 비룡(飛龍) 바위, 원한(怨限) 바위 등이 있다.



5) 마을의 특징(特徵)

① 여호재(驪湖齋)

문화유씨(文化柳氏) 선조 군자감정(軍資監正) 유전(柳田)의 묘실(墓室)이다. 공의 부친 희상(希祥)은 다사 문화유씨의 입향조(入鄕祖)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본읍 방천으로 우거(寓居) 해 왔다. 4칸곡자형, 홑처마이다.

② 척호정(F帖亭)

방천리(坊川里) 와룡산록(臥龍山麓)에 있다. 오려(五盧) 유기춘(柳基春)의 사정(私亭)이다. 공(公)이 만년(晩年)에 척호정(陟帖亭)을 지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③ 다사 제5경(第五景) 금호어적(琴湖漁笛)

옛날엔 다사면에 연접한 낙동강과 금호강에 수많은 어선들이 크게 성황을 이루었고, 특히 이곳에서 많이 잡히고 있는 잉어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어부들이 이곳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고기를 많이 잡게 되면 기분이 좋아서 배 위에서 마구 법석되고 피리를 요란스럽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달빛이 고요하게 빛날 때 대부분의 어선들은 강안에 매어 있고 배에선 수없이 많고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는 저녁 멀리 배를 타고 나와 밤전경을 즐기는 어떤 나그네의 처량한 피리소리는 고요한 달빛과 어우러져듣는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음력 7월 기망일(旣望日(16日))에는 사림(士林)에서 월계(月柱)를 구경하는 풍습이 있다.

④ 다사 제6경(第六景) 방천철교(坊川鐵橋)

경부선(京釜線)을 통과하는 철교로서 그 규모나 높이가 이상적으로 잘 되어 있기 때문에이 다리위를 지나갈 때는 잘 모르지만 금호강에 배를 띄우고 다리 밑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주위에는 버드나무와 잡목들이 무성하게숲을 이루고 있고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금호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금호강위로 이방천철교가 놓여져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잘 어우러진 이 부근의 좋은 경치는 지나가는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⑤ 신수점(身數占)

이 마을에는 많은 집에서 1년간의 신수와 재수점을 치는데 대개 음력 보름날 저녁에친다. 그날 아침에 큰 천변(川辺) 이나 삼거리 길바닥에 짚으로 인형(人形)을 만들어 오색천조각을 달아서 길 주위에 밥을 싸가지고 버리는 풍습이 있다.

⑥ 화전(花錢)

이곳 부녀자들이 와룡산(臥龍山)에 산재(散在)해 있는 진달래 꽃을 산에 올라가 따서 찹쌀가루와 함께 화전(花錢)을 구워 먹는다.

① 영친왕(英親王)을 읍송(泣送)

광복후 신설된 부락 속칭 원동(院洞)은 옛날 부산(釜山) - 대구 - 서울을 통하는 중앙통로인 방천리 역원(驛院)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역마장(驛馬場)이있었다 하여 「마장터」라 부르는 말터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일합방(韓日合邦)당시 일인들이 영친왕(英親王)을 옥(玉) 가마에 태우고 일본으로 갈때 원동(院洞)에 있는역원(驛院)을 통과하였는데 대구 서북쪽의 남여노소 수만이 모여 이곳에서 달성공원까지 영친왕의 행로에 광목을 깔고 전송을 하면서 비분의 눈물이 비오듯하더니 종내(終乃)에는 울음을 터뜨렸으며, 억송저지(抑送沮止) 투쟁까지 벌였으나 왜군들의 진압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곳 역원은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다.

⑧ 기타(其他)

○ 마을회관은 1979年 사업비 2백90만원을 들여 건평 15평 건립

○ 교량가설은 1973年 사업비 40만원을 들여 폭 4.2m, 길이 7.2m 가설
   1974年 사업비 1백만원으로 폭 5.1m, 길이 12m 가설
   1976年 사업비 46만2천원을 들여 폭 4.8m, 길이 6m 가설


○ 농로는 1974年 사업비 1백50만원을 들여 총연장 1,000m 확장


○ 소류지는 1978年 사업비 1백9만원을 들여 높이 3m, 길이 22m 보수


○ 소하천은 1979年 사업비 72만4천원을 들여 1개소 4m 복개


○ 마을진입로는 1980年 사업비 1백59만원으로 폭 3m, 총연장 120m, 포장


○ 마을안길은 1980年 사업비 23만7천원으로 폭 2.5m, 길이 200m 포장


1998년 발행 달성마을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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