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방
류잠(문화류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07 11:23:18       조회수 : 520 파일 :




柳潛(文化 柳氏) 墓



옛 안산 땅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과 군자면 땅이 된다. 동쪽으로는 안양시에 접하며, 남쪽으로는 수원시와 이웃하고, 서쪽으로는 인천시에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서울에 인접, 거리가 50리 안팎이다.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이던 것이 신라 경덕왕 때에 장구군으로 고치었고, 고려 초에 안산군으로 개칭했다. 뒤에 감무를 두었고 충열왕 34년 문종이 안산 땅에서 탄생해 군으로 승격시켰다. 한 때는 연성으로 불린 적도 있다.

고을의 면적은 작지만 토산물 (소금 · 해산물)이 많이 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졌다.

산세로는 과천 관악산 落脈이 뚝 떨어져 서주하여 수리산 (수암산) 이 솟아 있으니 이 산이 안산의 진산이다. 혹은 견불산이라고도 부르는 수리산 낙맥이 다시 서쪽으로 달리어 마하산 오자산 (오봉산)을 이루고 서남으로는 광덕산을 펼쳐 놓았다.

오자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치달리는 산맥은 관모산(성인산)을 정해 놓고 다시 서쪽으로 내닫다가 한 줄기는 군자봉을 이루니 산세가 천봉우리 만봉우리로 갈리어 바다를 연하여 포진하고 있다.

수리산 낙맥에 산재해 있는 명당 자리들은 오리허로 혹은 십리 15 리, 30리까지 동서남북으로 펼쳐 있다.

연화부수형 · 행주형 · 장사형·비금탁목형 · 갈룡음수형 · 장군대좌형 · 옥녀용형·복사형 · 영구예미형 등 형국 모두가 다 세세흥왕하는 부귀쌍전의 대지로 지목되고 있다. 아직도 미처 찾지 못하여 쓰지 못한 자리가 몇군데 남아 있어 지관 나그네들의 발자취를 간간이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번에 논하고자 하는 명당자리는 안산 땅에서는 빼놓을래야 빼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전설이 담겨있는 곳이다.

이조 선조 때 있었던 일이다. 문화 류씨 류 차달의 19대 손에 류 잠이란 분이 있었다. 소년에 등과 하여 벼슬이 예조와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선조조 병자년 10월에 가깝게도 명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니 선조대왕께서는 애석히 여겨 문령부원군에 봉하고 국사지관으로 하여금 묘터를 잡도록 하였던 것이다. 지관은 어명을 받들어 여러 고장의 산천을 답사한 끝에 지금의 자리를 정하였다.

류 잠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류 자신이요, 둘째 아들은 덕신이었다. 장자 류 자신은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漢城判尹(지금의 서울 특별시장)을 역임하여 권세가 장안에 등등했고, 자손 또한 만당하여 아들 6형제에 어여쁜 딸까지 두었다.

어여쁜 딸은 재덕과 부덕이 겸비하여 나라에 간택되어 마침내 광해군 왕비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류 자신은 문장부원군에 작후를 받아 권세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생인 덕신은 돈령부도정 정삼품의 당상관에 올랐다.

류씨 집에는 여러 노복들이 많았다. 그중에 한 여 종이 크게 일을 잘못 저질러 놓은 일이 있었다. 류대감은 관속 하인으로 하여금 치죄를 하게 하니 여종은 끝내 자기 잘못을 은폐하려드는 것이다. 류대감은 괘씸하게 여기던 끝에 끝내 부인 하려드는 여종을 보니 화가 머리 상투끝까지 치밀어 호통을 치다 마침내 물고를 내라고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곤장을 든 관속들은 사정없이 내리치니 나약한 계집종은 마침내 명을 거두고 만 것이다. 계집종이 죽은 후 10년이란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류대감은 따뜻한 어느 봄날 성묘 차 시골 선 영묘에 왔다가 며칠 쉬느라고 툇마루에 앉아 시골 선비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동구밖을 바라보니 어느 중 하나가 점잖은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은 시주받으러 다니는 것 같지 않고, 이집 저집다 제쳐놓고 류대감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온다. 류대감에게 다다른 중은 공손히 합장 배례하고 인사한다. 『소승 문안드리옵니다.

류대감이 바라보니 젊은 중이었다. 뜻하지 않은 중을 맞은 류대감은 은밀히 물어보았다.

『대사는 어느 산 어느 절에서 이 시골까지 내려왔는고?」

「네, 소승은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에 있사온데 시주차 다니다 보니 대감댁 문전에까지 이르게 되었나이다.」

유대감이 중의 모양을 관찰해 보니 눈에는 정기가 초롱초롱하며 기골이 장대한 데다 음성 또한 노고성으로 예사 중과는 다른 품이 나타남을 직감하였다.

「대사, 다리도 아플테니 잠깐 쉬어감이 어떠한가.. 『감히 소승이 어찌 대감 곁에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중은 거듭 겸손해 한다.

대감이 다시 권하는 바람에 중은 바랑을 풀어 놓고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 받다가 두 사람은 저녁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야 일몰임을 깨달았다. 이들은 다시 사랑방에 자리를 같이 하여 저녁상을 물리고 술상을 차려 놓고 밤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급기야 중에 대한 내력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중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어려서 충청도 천안 땅에 살았는데 한해 겨울에 염병이 들어 동네에 사람이 부지기수로 죽어갔다. 그 가운데 자기의 양친을 다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강원도에서 왔다는 중을 따라 나이 7세에 입산수도의 길에 들었던 것이다.

착실히 수도에 정성을 기울여 불도를 닦으니 주지스님은 상좌로 입적을 시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글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물리를 터득한 중은 뜻한 바 있어 주지스님께 하직을 고하고 도승을 찾아 나섰다.

이 고장 저 고장 천산 만산을 두루 살펴 찾아간 곳이 금강산 유점사였다. 여기에서 도승을 만난 상좌중은 십여년 동안 천문·지리를 연구하고 닦았다. 지리에 통달한 중은 금강산을 떠나 팔도강산의 명승 고적과 명당자리를 구경하며 뜻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일러주어 구제안민의 도를 닦으러 나섰다는 사연이다.

중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유대감은 젊은 중이 도승으로 여겨져 마음이 더욱 더 흐뭇해짐을 깨달았다. 이튿날 유대감은 도승을 선영 묘소로 안내하였다.

도승은 유대감의 선영 산소를 훑어 보고는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대감, 「人穴却局 天穴下면 富貴出兮 司期」라는 산서와 같이 참으로 천하대지입니다. 연결한 본룡의 세는 용사 비등하는 듯하며 좌우로 산회수회 하여 용호가 상종하니 어찌 국세가 길하지 않으며, 유빈유주하여 주객이 분명하오니 어찌 세세풍영하지 않으오리까? 또한 용요 수회 하며 산천이 수려하니 어찌 자손들이 부봉 만호후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감님, 형국으로 논할진대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상입니다. 저 청룡 머리와 백호 머리를 보십시오. 마치 닭이 날개를 움츠리는 듯한 형상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보이는 것은 속사들이 보는 눈입니다. 자세히 이 산세를 관찰해 보십시오. 이 산 내룡에 입수후면의 용신을 보면 아리따운 미녀가 가슴을 헤치고 넌지시 기대어 양다리를 쭉 펴고 비스듬히 누운 형상입니다. 저 안산을 바라보십시오. 마치 선관이 무슨 일을 치르러 달려드는 형상 같지요. 선관이 양팔을 벌리고 금세라도 덮치는 듯한 기상이요. 가운데 뻗어 내려온 긴 산등은 바로 역두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온데 아깝게도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읍니다. 사람의 태가 수혈로 비롯되는 것이온데 여기에 저 선관과 이 옥녀는 음양 교차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 하고 탄식하며, 류대감을 바라본다.

대감은 한 무릎을 다가 앉으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 방법이 있느냐고 성화다. 중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감님, 이 묘 앞에 신도비가 있지 앓습니까? 저비의 거북 머리가 안산에서 뻗은 긴 등을 마주하여 있기 때문에 선관과 옥녀의 뜻을 이루지 못하오니 거북머리를 이 쪽으로 돌려 놓아야 합니다. 또 한편 이 묘 밑에 맑은 연못이 있으니 그 연못 물을 한번 퍼내어 말린 연후에야 지덕을 누리게 됩니다. 』고 말을 맺었다.

이 말을 들은 류대감은 「쾌재라 쾌재라」를 연발하면서
『도승이여, 어찌 고승의 말을 안 쫓겠는가!」고 좋아 했다.

이튿날 대감은 역군들을 모아 한쪽으로는 안산 군자봉을 깎아내리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신도비 거북머리를 돌려 놓는 일에 감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한쪽에서는 용두레 (물 퍼내는 두레) 열 두틀을 대어 놓고 맑은 연못을 퍼내기 시작했다.

열 두 두레박이 한 나절을 퍼내어도 물은 한 방울도 줄어들지 않고물빛은 여전히 퍼렇기만하다.


대감이 괴이하게 여겨 도승에게 까닭을 물었다.「한나절을 퍼내어도 물빛이 아직 퍼렇기만하니 어찌하면 이 물을 다 퍼낼 수 있을까?』

도승은 물을 속히 퍼내는 방법을 말했다.「이 연못 물을 말리자면 버드나무 장작을 연못 네귀퉁이에 쌓고 불을 붙이면 물이 모두 마릅니다. 」대감이 곧 명령하여 그대로 하고보니 과연 그 때부터 물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삼식경에 물을 다 퍼내고 말았다. 바닥이 드러날 지경에 이르러 더욱 괴이한 일이 생겼다.

한 마리 용이 하늘을 바라보고 불끈 솟아 오르다가는 명수폭에 걸려 떨어지기를 몇 번씩이나 하더니 끝내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이 아닌가.

류대감이 실망하면서 도승을 찾아 보았으나 도승은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자손들은 인조반정으로 인하여크게 해를 입었다.

(명당 자리에 손을 잘못 대면 파명당이 될 수 있다.는 지리설의 한 예이다.)


1985年 發行 韓國의 家寶에서 拔萃


리스트
댓글 0

족보의 유래
족보의 종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