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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05 12:19:34       조회수 : 503 파일 :

 

 

족 보(族譜) 

웬만한 집안에는 족보가 있고, 그것은 그 집안의 뿌리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요즘의 신세대들은 그것을 케케묵은 유물쯤으로 치부해 버리고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경향이 있어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뿌리 찾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족보를 쉽게 풀어써서 한자를 모르고 영상매체에만 익숙한 젊은 세대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끔 하려는 바람이 일부 가문들로부터 불고 있으며 비디오 족보, 컴퓨터 족보, 전화 족보 등의 개발로 그 필요성과 관심을 고조 시키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즈음하여 옛 선조의 생활과 족적을 알 수 있는 족보란 과연 무엇인지, 그 것은 어떠한 기준으로 무슨 내용들을 싣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 일뿐 아니라 전통문화 계승발전이라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 될 것이다.



족보의 유래와 일반상식



1. 족보(族譜)의 유래와 기원



족보란 한 종족의 혈연 관계를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기록한 계보(系譜)와 문벌 기록(門閥錄)과 선조의 가장(家狀), 행적(行蹟), 묘비명(墓碑銘) 등을 모아 정리한 이를테면 한 씨족의 역사책이라 하겠다.

한 나라에는 그 나라 국민들이 전개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의 활동을 기록한 국사(國史)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씨족 집단에서는 그 씨족의 구성원들이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국가와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활동한 자취를 기록한 족보가 있는 것이다. 각 씨족의 구성원들을 합친 것이 국민이라 한다면, 그들의 활동기록인 족보를 합한 것이 국사의 한 부분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히들 족보는 동양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세계라의 족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설픈 것이다. 즉, 우리 나라의 족보는 동성동본에 속하는 동족의 전부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해 외국의 족보는 왕실계통이나 일부 귀족의 것을 제외하고는 대개 자기 집안의 가계를 간략하게 기록한 가첩(家牒)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서양에서 족보가 발달한 나라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을 꼽을 수 있다. 나라마다 족보학회가 있어 정기적으로 족보학 학술회의를 열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족보학회는 1895년 창립되어 미국 내에 수백개소의 지회를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양에서의 족보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후한(後漢) 이후부터 고관을 배출하던 씨족들이 늘어나게 되니 문벌과 가풍(家風)을 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벼슬에 오르거나 승진(陞進), 혼인(婚姻)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각 종족은 자기 가문의 문벌과 계통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위(魏)나라 때는 더욱 발달되어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 위나라의 조조가 실시한 제도로 각 주, 군, 현에 지방장관과는 별도로 중정을 두어 그 중정이 지방의 인사를 덕행, 재능에 따라 9등급으로 분류하여 중앙의 이부에 추천하는 제도)을 제정하여 관리를 등용하였고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보학(譜學)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남조(南朝)의 제(劑)나라 사람인 가희경(賈希鏡)을 보학 연구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3대가 모두 보학에 밝았다고 한다. 그의 조부 가필지(賈弼之)는 각 성씨의 족보를 모아 기초를 닦았으며, 아버지 가비지(賈匪之)도 이를 계속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가희경에 이르러 중국 전토 각 사족(士族)의 족보를 총망라하여 1백질 7백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사인 족보의 시초로 가장 정확한 계보라 전한다.

이렇듯 족보는 처음에는 관리를 뽑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차차 그 목적은 사라지고 종족을 규합하는 성격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족보는 고려 때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고려 중엽 이후로서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임경숙(任景肅)의 <선원록(璿源錄)>이 그 효시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왕실의 친척인 종자(宗子 ; 종가의 아들)와 종녀(宗)까지 기재하는 등 족보의 형태를 처음으로 갖추었다.

고려시대에는 동족간에 족보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부자 관계가 밝혀져 있는데 이것이 후대에 나온 각 씨족들이 족보를 만드는 근원이 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책을 관청에 보관하여 관리를 선발하거나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였다. 또 결혼하는 데에도 이용하였다. 즉 문벌이 낮거나 귀족이 아닌 종족은 과거를 보거나 관리를 뽑히는 데에 많은 차별을 받게 되었으며, 문벌에 차이가 있는 가문과는 혼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록문서는 종부시(宗簿寺)라는 관청에서 관리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상신록(相臣錄)>, <공신록(公臣錄)> 등이 정비되어 그들의 시조나 부자 관계를 일부분이나마 알게 되었다.

2. 보학(講學)이란 무엇인가

보학은 간단히 말하면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옛날에는 벼슬아치나 선비들의 교양 학문이었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사학(史學)은 물론 사회학, 정치학, 행정학, 민법학, 민속학 등의 보조 학문으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정치 권력의 이동이라든가 사회계층의 변화 연구는 물론 인사제도, 가족제도와 가족법, 자연부락의 조직 및 생태 등을 연구하는 데에도 족보가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보학은 모든 성씨의 관별(買別) 또는 같은 뿌리를 가진 시조(始祖)의 혈통을 이어받아 전해오는 동족의 씨족사적인 족보를 비롯하여 전기, 행장(行狀), 문집(文集) 등의 기록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 이는 중국에서부터 발달하였으며 <통지략(通志略)> 등의 사서를 보면 보첩류(譜牒類)라 하여 황족의 총보(總譜)를 비롯하여 운보(韻普), 군보(郡普), 가보(家譜) 등으로 나누고 사가들은 보학을 정사의 일부로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종부시(宗簿寺)를 중앙 부서에 두고 왕실의 보첩류를 맡아보게 하여 왕대 연표(王年表)와 왕자들에 대한 전기 등을 수록하여 왔으며, 그후 조선조로 이어오면서 관제상 변함없이 종부사를 두어 왕실이나 왕족들의 계보(系譜)인<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찬하여 <조선국보(朝鮮國譜)>를 만들었으며 또한 <국조보첩(國祖譜牒)>이라 하여 태조 이래의 세계(世系)를 편찬한 것으로 왕과 왕비의 존호(尊號), 탄생, 승하(昇遐), 능침(陵寢), 자녀 등에 관하여 기재하였다. 물론 종친(宗親)간의 배위(配位), 혼인관계, 생몰 연월일 등도 상세히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기술로서 부계(父系) 중심의 계성(姓)을 위주로 하여 개인적으로 국가나 사회에 끼진 행적은 물론 그 배위에 관하여 성씨와 더불어 부(父), 조(祖), 증조(曾祖), 외조(外祖)까지를 밝히고 있으며 출간한 딸 또한 사위의 성, 본관, 이름은 물론 그의 아들인 외손까지 등재하여 가히 삼족(三族)을 한눈으로 간파할 수 있도록 상세히 수록함으로써 그 당시의 친인척 관계를 배경으로 사회적 활동 상까지를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상과 같은 보학이 주(周)나라 때부터 발달하여 왕실의 계통을 기록하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보학은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이 역시 <사기(史記)>가 나오게 됨으로써 왕후제족(王侯諸族)이나 귀족권문(貴族權門), 또는 지방장관 등은 물론 일반 서민에게도 차츰 가계의 보첩 등을 소중히 여겨 동족(同族) 일문(一門)이 가첩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학문으로 보학을 연구하였으며 더욱이 관리에 대한 추천법인 현량과(賢良科)가 생기면서부터 더욱 발달하여 역사학의 보조학문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여 왔다.

< 당지(唐誌)>에 의하면 육경헌(陸景獻)이 지은 <육종계력(陸宗系曆)은 종계보(宗系譜)로서 자기 가문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명문거족인 가문에서는 덕을 쌓는 것을 자손들이 계승하여 아버지, 할아버지대의 명성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러한 개인 또는 사가(私家)의 내력을 기록한 것 등이 역사학자들에게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한(淡)의 유향(劉向)이 <세본(世本)>을 만들어 씨성(氏姓)의 출처를 밝힌 이후로 보학은 날로 발달하여 위(魏)나라 때에는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생겨 품수(品數)에 따라 각자 성씨의 내력과 그들의 인물을 평하여 조정에서 등용하는 제도까지 두었었다.

중국의 보학 사상 보학을 체계 있게 연구한 사람은 남북조시대 제(齊)나라의 가희경이라 알려져 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보다 앞서 송(宋)나라의 소순(蘇洵), 소식(蘇軾), 서철(蘇轍)등도 보학에 능하여 계보 등을 편찬하였다고 하나 가희경의 조부 가필지가 각 성씨의 족보를 모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그의 아들(가희경의 아버지) 가비지는 이를 계속 연구하여 주서(注書)를 덧붙여 놓았다. 이를 가희경이 중국 사족(士族)의 족보를 한데 모아 1백질 7백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으로 집대성하였던 것 이다. 이것이 사족의 계보로서 체계를 갖춘 최초의 족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 의종(毅宗) 때에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족보문화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조선 성종 7(1476)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가 출간됨으로써 보학이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권문세가는 물론 명문거족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족보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후 족보 발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조선시대에 특히 족보 발간이 활발해진 것은 애친경장(愛親敬長)의 조상을 숭배하는

정신을 인륜의 바른 길이라 하여 교화하는 유교가 조선의 국교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



우리 나라에서 동성 동본의 혈족 전부를 체계적으로 망라한 세보가 등장하기는 1400년대 들어서였다. 그러한 본격적인 족보의 효시로는 규장각(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는 <안동 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와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譜)를 꼽는다.

성화보는 조선 성종 7년(1476)에 간행된 족보인데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인성화(成化) 12년에 간행되었다 하여 ‘성화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족보는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만 전해진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간행된 족보는 


문화 유씨의 가정보란 기록이 있다. 가정(嘉)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로 이때 간행되었다 하여 `가정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보는 성화보보다 86년 늦은 1562년에야 간행되었으니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한편 가정보 서문에는 가정보가 발간되기140년 전인 명나라 영락(永樂) 연간, 즉 조선 세종 때에 이미 문화 유씨의 족보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영락보나 <가정보>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은 없다.

문화 유씨의 가정보는 완벽한 체계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외손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후에 여러 족보를 만드는 데 좋은 모델이 되었다.

안동 권씨의 <성화보>에는 서거정(徐居正)이 서문을 지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종법(宗法)과 보첩(語)이 없고, 거가대족(巨家大族)은 있으나 가승(家承)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성종조 이전에는 체계를 갖춘 족보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앞서 든 안동 권씨와 문화 유씨 이외에 파평 윤씨(坡平尹氏)도 족보를 간행하게 되었는데 안동 권씨의 <성화보>보다 63년 뒤이고, 문화 유씨의 <가정보>보다는 23년이앞선 조선 중종 34년 기해(己亥), 즉 1539년이었다. ‘기해대보(己亥大譜)라 하는데 이족보는 당대의 대제학 소세양(蘇世讓)이 서문을 썼다.

몇몇 유력한 씨족만이 지녔던 족보가 더욱 일반화되기는 선조(1567~1608)를 고비로하여 당쟁이 차츰 가열되고 그것이 또 점차 문벌간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면서각기 일족의 유대를 공고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벌의 결속을 꾀하는 방편의 하나로 족보가 발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추세라고 할 수있다.

그 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격심한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종래의 엄격했던 신분제도가 붕괴된 것이 족보의 발달을 촉진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신분제도
는 정신을 인륜의 바른 길이라 하여 교화하는 유교가 조선의 국교였기 때문이다.가 해이해짐에 따라 양반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심지어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 혈족(血族)인 양행세하게 되자 동족의 명부라고 할 족보를 만들어 다른 혈족이 혈통을 사칭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과정에서 족보를 둘러싸고 갖가지 폐단이 생기게 되었지만 족보의 본래의 뜻은 어디까지나 자기네의 혈통을 존중하고 동족끼리의 유대를 돈독히 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1999年 韓國姓氏史料硏究院 發行 譜學便覽 拔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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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