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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05 11:33:20       조회수 : 819 파일 :

 

 

성씨

 

 

성씨(姓 氏)


성씨란 본시 혈통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부호로서 혈연의 관계를 나타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무렵, 즉 씨족 중심을 벗어나 부족사회(部族社會), 또는 부족국가(部族國家)로 형성 발전하면서 서로의 가통을 호칭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원시사회로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 역시 묵과할 수 없는 절대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인류사회로 구성하는 모체는 곧 혈연으로부터 발전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각기 자기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 나름대로의 호칭(산, 강, 골짜기 등)이 있었을 것으로 간주되며 그 호칭 자체가 성(姓)으로 발전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동일 혈통의 씨족끼리는 서로가 화목하며 씨족 또는 부족의 우두머리를 숭배하면서 타성(他姓), 즉 이족(異族)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왔으며 서로가 공존의 뜻을 합세하여 국가로까지 발전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성(姓)과 씨(氏)는 중국의 삼대(夏,殷,周)이전에는 남성은 씨로, 여성은 성으로 부르다가 후대에 성씨가 합쳐졌다. 씨는 신분의 귀천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사람은 씨가 있었으나 천한 사람은 씨가 없고 이름만 있었다.

중국의 문자 구조의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성인지소생야(姓人之所生也)`라 했듯이 성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시대별로 부계와 모계가 다를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좌전(左傳)>에는 “천자건덕인생이 사성(天子建德因生以賜姓 ; 천자가 유덕한 자를 제후로 봉할 때 그의 조상의 출생지로서 성(姓)을 주었다)”이라 했다. 때문에 각 개인의 성에 의해서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구별할 수 있었다. 

 


1. 성씨의 기원

성이란 같은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본관(本貫)과 함께 다른 혈족과 구별하는 데 사용되는 칭호다.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혼인제도가 없었던 모권사회에 있어서 어머니는 알 수 있어도 아버지를 알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모계(母系)의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되었다. 경제 활동은 수렵경제에서 목축경제로 변하고, 다시 농업경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짐승이나 목초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일정한 곳에 정착을 하게 되었고,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것을 재산이 사유화되면서 경제제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굴 같은 곳에서 함께 모여 살던 것이 차차 일부일처(一夫一妻)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경제 생산에 힘이 센 남자가 가정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일부일처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확실해짐에 따라 비로소 부권사회(父權社會)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모계의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던 집단은 차차 부계의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살게 된 것이다.

원시사회에서는 모권사회 이건 부권사회이건 간에 모두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으므로 이러한 사회 집단을 씨족사회라고 부른다. 이 씨족사회는 같은 혈연과 같은 조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인 만큼 단결과 협동으로 사냥이나 고기잡이, 농사 등의 힘든 일을 함께 할 수 있었고, 적이 침입했을 때 공동으로 방어하는 등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씨족사회도 점차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게 되어 한 조상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자연히 좀더 가까운 혈연끼리 모여 살게 되었으므로 한 씨족사회는 많은 씨족집단으로 갈라지게 된다.

사회생활이 점차 발달하고 복잡하게 되어 감에 따라 한 씨족집단이 단독으로 사는 것보다 혈연이 가까운 다른 씨족 집단들과 공동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군사적으로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혈연이 같은 각 씨족집단이 서로 모여 한 사회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회를 부족사회라고 부른다.

부족사회는 다른 부족사회와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만들게 되었고, 다시 한 부족국가가 다른 부족국가들과 합쳐서 부족국가연맹(部族國家聯盟)을 만들게 되어 점점 집단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사회의 규모가 작았던 씨족사회에서는 같은 조상을 가진 혈연끼리 모여 살았으므로 씨족을 지칭하는 이름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국가연맹처럼 조상이 다른 집단이 모인 사회에서는 각각 자기 씨족을 가리키는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는 글자가 없었던 때이므로 자기 씨족이 살고 있는 강이나 산 이름으로 씨족의 이름을 삼았다. 이것이 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은 중국 민족으로 중국에서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부터 제후들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혹은 강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는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살았으므로 강(姜)이라는 성을 붙여 불렀으며,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는 어머니가 희수(姬水)에서 살았다 하여 성을 희(姬)라 했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는 요하(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요(姚)라는 성을 붙여 불렀던 것이 그 좋은 예 이기도 하다.



2. 우리 나라 역사 속의 성씨

우리의 성씨는 1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독특한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씨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성씨는 외국인의 성씨와 어떻게 다르며, 어떠한 역사적인 과정을 밟아 변천해 왔으며, 얼마만한 성이 어떻게 분포되어 왔고, 또 본관이 왜 생겼으며 동성 동본이란 어떤 뜻을 갖는 것인지, 또 우리 민족이 오늘날의 형태로 형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이민족이 들어와 우리 민족에 동화되었는지 하는 것 등은 매우 중요한 알거리 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이 현대로 오면 올수록 엷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짚어 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뿌리에 대해 알게되고 자부심을 갖게도 될 것이라 생각된다. 

 

 

(1) 고구려 시대의 성씨(姓氏)



고구려, 백제, 신라 즉,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 고대 씨족공동체 사회에서는 성이란 것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지(魏誌>`예전(濊傳)에 나타나 있는 우리 나라에 관한 기록에 “其俗重山川 山川 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그 풍속은 산천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천에는 각기 부분이 있어 서로 넘나들거나 상관하지 않으며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라는 얘기가 있다. 이를 보면 당시 중국인들이 우리 토착사회에서 그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을 보고 일정한 집단을 동성(同姓)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성(姓)을 사용한 나라는 일찍부터 한(漢)나라와 접촉하였던 고구려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관계로 중국 문화에 접하는 기회가 많아서 중국의 성씨를 빨리 모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소노부(消奴部),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 연맹으로 출발하여 처음에는 소노부가 패권을 잡아 맹주의 역할을 하여 왕위를 계승하다가 고구려 건국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계루부에서 나와 세력을 폄으로써 주도권을 빼앗았다.

고구려 임금의 성은 처음에는 해씨(解氏)였다가 제6대 왕인 태조(太祖) 이후에는 고씨(高氏)가 왕위를 계승했다.

태조왕은 그 이전의 왕인 해씨와는 계통을 달리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족의 방계인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주몽(朱蒙 : 동명왕)의 성을 그대로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보인다.

B.C. 80년경 후한(後漢)시대에 완성된 전한(前漢)의 역사서 <한서(漢書)>의 ‘조선전(朝鮮傳)`을 보면, 동명왕(東明王) 주몽(朱蒙)을 “고구려후(侯) 추(騶)”라 기록하고 있다. 추는 주몽의 이름이므로 성이 없었던 셈이다.

A.D. 265년경 진(晉)나라 초기에 만든 위(魏), 오(吳), 촉(蜀)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속에는 `고구려전(高句麗傳)`과 `공손도전(公孫度傳)` 있다. 그 글을 보면 고구려 1대 왕인 동명왕을 추(騶)로, 6대 태조왕을 궁(宮)으로, 7대 차대왕(次大王)을 수성(遂成)으로, 8대 신대왕(新大王)을 백고(伯固)로,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을 이이모(伊夷模)로, 10대 산상왕(山上王)을 위궁(位宮)이라 하여 성이 없고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가우거(大加優居), 주부연인(主簿然人) 등의 말이 나오는데 `대가`는 부족장(部族長)을 가리키는 말이고, ‘우거`는 이름, 주부는 종2품 정도의 벼슬이었고 `연인`은 이름이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볼 때 이때까지는 성은 없었고 이름만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A.D, 487년 제(齊)나라 무제(武帝) 때의 영명(永明) 5년(고구려 장수왕 75년)에 만든 송의 역사서 <송서(宋書)>에는 장수왕을 고련(高璉)이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 왕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 <송서>에는 장수왕이 중국에 보낸 사신의 이름으로 고익(高翼), 마루(馬婁), 손수(孫淑), 동등(董騰) 등이 나오는데 이들의 고, 마, 손, 동 등이 모두 성씨이다.

A.D. 554년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의 천보(天保) 5년(고구려 양원왕 10) 에 완성된 북위의 역사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동명왕을 고주몽(高朱蒙)이라 하여 성씨와 이름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그후 당(唐)나라 태종 6년(고구려 보장왕 5년)에 완성된 진(晉)나라의 역사서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 동이조(東夷條)에는 고구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쇠(釗), 22대 안장왕(安藏王)을 안(安) 등으로 기록해놓고 있어 오히려 성이 없는 이름뿐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옛 기록을 보면 중국의 기록과는 다르다.

1145년 고려 인종(仁宗) 23년 김부식(金富軒)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 인물들의 성씨가 많이 보인다. 동명성왕이 신하들에게 성을 내려 주었다는 극(克), 중실(仲室), 소실(少室)씨 등과 유리왕(瑠璃王)이 내렸다는 위(位), 우(羽)씨,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내렸다는 낙(絡), 부정(負鼎), 대실(大室)씨 등은 사실이 아닌 전설로 치부하더라도 제3대 대무신왕 때 좌보(左輔) 벼슬을 한 을두지(乙豆支), 우보(右輔) 벼슬을 한 송옥구(松屋句)가 나와 있고, 또 6대 태조왕 때의 좌보 목도루(穆度婁)와 우보 고복장(高福章), 8대 신대왕 때의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 10대 산상왕 때의 국상 을파소(乙巴素), 11대 동천왕 때의 국상 고우루(高優婁), 명림어수(明臨於嶽), 14대 봉상왕(峰上王) 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등과 같이 성씨와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름도 나온다. 또한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禮), 송(松), 우(于), 연(緣), 주(周)씨 등이 눈에 띈다. 

한편 <삼국사기>보다 330여년 앞서 편찬된 일본의 <성씨록(姓氏錄)>에는 일본에 귀화한 백제, 신라, 고구려, 임나(任那) 사람들의 이름이 수록 되어 있으나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역사책들, 우리의 <삼국사기>, 일본의 <성씨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모순된 점이 있으므로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장수왕 이전의 성은 뒤에 소급해서 붙인 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고구려의 성에는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于), 주(周), 마(馬), 손(孫), 동(董), 예(芳),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무렵의 성은 후대의 성과는 개념을 달리 하는 것으로 중앙 또는 지방세력 중에서도 핵을 이루는 유력한 족장(族長)들의 정치적 신분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 백제시대의 성씨(姓氏)



중국의 <진서(晉書)>, <송서>,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 <주서(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등 여러 나라의 역사책에는 백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부터 27대 위덕왕(威德王)까지 (AD 346 ~ 598)는 근초고왕을 여구(餘句), 18대 진지왕을 여영(餘瑛), 20대 비유왕(毗有王)을 여비(餘毗), 21대 개로왕(蓋鹵王)을 여경(餘慶), 25대 무령왕(武寧王)을 여릉(餘隆), 26대 성왕(聖王)을 여명(餘明), 27대 위덕왕(威德王)을 여창(餘昌) 등으로 백제왕실의 성을 여(餘)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수서(隨書)>와 <당서(唐書)>에는 29대 무왕(武王)부터는 여(餘) 앞에 부(夫)를 붙여 부여(扶餘)로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백제에서는 13대 근초고왕 때부터 성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층국의 당나라 때 편찬된 <북사> `백제열전`에 나타난 백제시대의 성에는 사(沙), 연(燕), 해(辭), 진(眞), 국(國), 목(木) 등의 성이 기재되어 있으며, 그 박에도 동부에 흘(屹)씨가 있었고, 왕(王), 장(張), 사마(司馬), 수미(首彌), 흑치(黑齒) 등 10여 가지 성이 있었다. 

 

 

(3) 신라시대의 성씨(姓氏)



신라 왕실의 세계(世系)를 보면 역대 56명의 왕 가운데 박(朴)씨가 10명,, 김(金)씨가 38명으로 되어 있다.
석(昔)씨가 8명이들 박, 석, 김씨의 연원을 살펴보면 B.C. 69년 3월 1일에 여섯 촌장이알천가에 모여서 나라를 맡아 백성을 다스릴 군장(君長)을 추대자고 의 논하고 하늘에 제례를 드리던 중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수풀 사이에 서기가 뻗치고 용마 한 필이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가 보았더니 박 같은 것이 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헤쳐보자 그 속에 사내아이가들어 있었다. 그래서 박 속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여 B.C. 57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래서 박씨가 나타나게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석씨는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 ; 지금의 영일)에 떠내려온궤짝을 한 노인이 발견 하였는데 그 속에서 나온 아이가 석탈해(昔脫解)였다. 그는 A.D. 57년 유리왕(儒理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김씨의 시조는 A.D, 65년(탈해왕 9) 금성(金城) 서쪽에 있는 숲인 계림(鷄林)의 나뭇가지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이름은 알지(閼智)라 했는데 그의 7대손이 미추왕(味離王)이다.

이래서 박, 석, 김의 3성이 등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씨 등을 일컫는 6촌 성은 A.D, 32년(유리왕 9) 6촌을 6부로 고치면서 박혁거세를 첫 임금으로 추대했던 여섯 촌장에게 각각 성을 내림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알천 양산(閼川楊山) 촌장 알평(閼平)에게 이씨, 돌산 고허(突山高墟)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 최씨, 무산 대수(茂山大樹) 촌장 구례마(俱禮馬)에 게손씨, 자산 진지(紫山珍支) 촌장 지백호(智伯虎)에게 정씨, 금산 가리(金山加里) 촌장 지타(祗陀)에게 배씨, 명활산 고야(明活山高耶) 촌장 호진(虎珍)에게 설씨를 각각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9성은 당초부터 그런 성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대에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성을 사용하게 되면서 각각 계보를 소급하여 붙인 것이라 봄이 정확하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 성을 소급해서 붙일수 있는 확실한 계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그 계보의 주체가 되는 친족공동체는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예는 540년부터 576년까지 신라 24대 진흥왕이 새로 점령한 국토를 순행하여 그곳에 세운 순수비(巡狩碑)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비석들에는 수행자 명단에 많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성은 나타나 있지 않고 대신 출신부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그 비석들에 나타난 이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진흥왕 22년 (561)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에 건립된 창녕비(昌寧碑)에는 거칠부지(居七夫智), 심표부지(心表夫智), 마알지(麻알智) 등이 나온다.

② 진흥왕 29년(568)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건립된 북한산비(北漢山碑)에는 정차내(丁次奈)란 이름이 나온다.

③ 진흥왕 29년(568)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사동의 만덕산 복흥사 뒤에있는 운시산 꼭대기에 세워진 마운령비(磨雲嶺碑)에는 거두부지(居杜夫智)란 이름이 나온다. 

 

이 외에도 25대 진지왕 3년(578)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戊戊塢作碑)와 26대 진평왕 때(579~632)에 건립된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도 성은 나타나 있지 않다. 비문에 나타난 거칠부, 심표부, 마알, 정차내 등은 성이 없는 이름이며, 지는 이름 밑에 붙인 존칭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순수비에 나타난 이름들은 24대 진흥왕 때는 물론, 25대 진지왕이나 26대 진평왕 때도 성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다만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때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는 “신라왕모태(募泰)가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고 나와 있는데 모태란 23대 법흥왕(法興王)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북제(北齊書)>에는 법흥왕 다음 임금인 진흥왕을 김진홍, 진평왕을 김진평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왕실의 김씨를 제외한 나머지 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김유신(金庾信)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김유신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인데 <삼국사기> 법흥왕 19년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비(妃)와 세 아들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더불어 국탕보물(國帑寶物)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예로써 대우하여 상등의 벼슬을 주고 본국(가락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는데 그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가락국이 법흥왕 때에 신라에 의해 병합 흡수 되면서 가락 왕실의 직계 후예가 신라의 최고 신분인 진골(眞骨)에 편입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무력이 바로 김유신의 조부이다.

그러나 뒤에 김유신의 누이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비가 되면서부터 김유신이 김씨를 사용하게 된 것 같다는 설도 있어 앞서 예로 든 <삼국사기>의 구절에 나오는 김구해도 김씨를 소급해서 붙인 것이며 김유신의 조부무력은 물론 아버지 서현(舒玄)까지도 ‘김’을 성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A.D. 42년(유리왕 19)가락국의 구간(九干 ; 9명의 추장)들이 귀지봉(龜旨峰)에서 금으로 된 상자를 발견, 그것을 열어 보자 여섯 개의 알이 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맨 처음 나온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금상자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 제일 먼저 나왔다 하여 이름을 수로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본다면 성의 표시가 없었다고 해서 곧 성이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고 보여진다. 또 고구려에서는 동명왕 때부터 신하들에게 성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는 고이왕 때부터 왕실에 성이 있었는데 유독 신라에서만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야 왕실에서 김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밖의 성들은 경덕왕(742~762) 이후의 일로 추정한 것은 무언가 이상하다. 경덕왕 때라면 당나라의 제반 문화를 수입하여 모든 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종래의 고유 지명도 한자로 고쳐 군현제(郡縣制)를 완비하였던 시대인 만큼 중국식 성씨 제도도 아울러 도입되어 상류층에 보급 되었으리 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도 성이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중국 문화가 들어온 뒤라 할지라도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중국식 한자 성을 사용하였으나 귀족이나 관리들일지라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성씨로는 앞서 언급한 박, 석, 김 등 3성과 6촌 성 이외에 9세기초 당나라에 갔다 온 후 청해진대사(靑海鎭大使)가된 장보고(張保皐)가 최초의 장씨로 등장하였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로운 성씨들이 등장하게 된다.



(4) 고려시대의 성씨(姓氏)



성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부터였다. 그렇다.고 태조 왕건이 일률적으로 성을 갖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후삼국(後三國)을 통합했다고는 하지만 개국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도 확립되지 않았으며 각 지방은 신라 말기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반란이 일어나던 무렵이라 각 지방을 근거로 독자적인 기반을 닦고 성장한 토착세력이 한 개 군(郡) 정도의 지역을 차지하여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지배영역 내의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거두어 들이는 등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성주(城主)나 장군으로 일컫고 있던 호족(豪族)들에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개국 초기부터 측근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새 왕조를 수립하는 데 공을 세운 중앙 세력에게 성을 많이 하사하였다. 또한 중앙과 연결된 호족들도 그들 나름으로 성을 갖게 됨으로써 많은 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홍술(弘述)을 홍유, 백옥(白玉)을 배현경, 삼능산(三能山)을 신숭겸, 복사귀(下沙貴)를 복지겸 등으로 태조 왕건이 성을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홍유는 악계홍씨(岳溪洪氏), 배현경은 경주 배씨(慶州裵氏), 신숭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 복지겸은 면천 복씨(沔川下氏)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왕건의 세력을 점차 넓히게 되자 각처에서 왕건의 편에 서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을 물리치고 고려 왕조를 창업하는 데 공을 세운 호족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주(溟州 ; 강릉) 장군이라 일컫던 왕순식(王順式), 벽진(碧珍 ; 성주) 장군이라 일컫던 이총언(李悤言), 고울부(高鬱府 ; 영천)장군 황보능장(皇甫能長) 등이었다.

왕순식은 명주의 호족으로 고려 건국 후에 까지도 지방에서 독립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승려로 고려 지배권에 살던 아버지가 귀순을 권하자 말아들 수원(守元)을 보내 귀부했으며, 다른 아들 장명(長命)에게는 1백명의 사병을 데리고 가서 태조의 왕궁을 숙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자신도 태조를 배알하여 왕씨 성과 대광(大匡)이란 관직을 받았다. 이총언은 왕건의 권유를 받고 아들 영(永)에게 군사를 이끌고 왕건을 돕게 했으며, 황보능장은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우고 영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총언은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시조가 되고, 황보능장은 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의 성씨 중 상당수는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홍유나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시조인 유검필(庾黔弼)처럼 군인으로서 공을 세워 중앙세력으로 등장한 인물도 있었고, 지방세력으로도 왕순식, 이총언, 황보능장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시조인 유차달(柳車達)은 황해도 유주(儒州 ; 문화)의 부호였는데 왕건이 견훤을 칠 때 1천 량의 수레를 동원하여 군량을 보급해 주었다고 하며,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시조 이도(李悼)는 왕건이 남정할 때 금강의 물이 넘쳐서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때 그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주었고,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공암(孔巖 ;양천)의 부농으로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군량을 대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들 외에도 고려 개국공신으로 각 성씨의 시조가 된 이들이 많았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 한란(韓蘭), 남양 홍씨(南陽洪氏)의시조 홍은열(洪殷悅), 홍주 홍씨(洪州洪氏)의 시조 홍규(洪規),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남양 방씨(南陽房氏)의 시조 방계홍(房季洪), 원주 원씨(原州元氏)의 시조 원극유(元克猷),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 윤신달(尹莘達), 용인이씨(李氏)의 시조 이길권(李吉卷), 청주 이씨(淸州李氏)의 시조 이능희(李能希),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 박술희(朴述希), 아산 이씨(牙山李氏)의 시조 이서(李舒),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시조 최준옹(崔俊邕), 풍양 조씨(豐壤趙氏)의 시조 조맹(趙孟), 영광 전씨(靈光田氏)의 시조 전종회(田宗會), 선산 김씨(善山金氏)의 시조 김선궁(金宣弓), 해평 김씨(海平金氏)의 시조 김훤술(金萱述),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시조 금용식(琴用式)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권행은 원래 김씨였으나 권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 외에는 성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은 없어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하던 성이었던 듯하다. 고려 건국 이전에 성씨가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근거로는 고려 초기의 호장(戶長)을 시조로 삼은 예가 많음을 들 수 있다. 호장이란 고려 건국초에 새 왕조에 귀부하지 않은 지방 세력들을 강제로 향리의 장으로 삼아 강제로 새 왕조에 귀속시켰던 것을 말한다. 그 예로는 신라에서 벼슬을 살던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고려가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고 이름을 극신(克臣)으로 고쳐 경산(慶山; 성주)에 숨어살다가 경산부의 호장으로 강제로 귀속되었고, 역시 신라의 신하였던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시조 유의신(兪義臣)은 기계현의 호장이 되었다. 그 외에 호장이었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로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한산 이씨(韓山李氏), 진성 이씨(眞城李氏), 합천 이씨(陝川李氏), 덕산 이씨(李氏), 고흥 유씨(高興柳氏), 단양 우씨(丹陽禹氏), 고령 신씨(高靈申氏), 순창 조씨(淳昌趙氏), 동래 정씨(東萊鄭氏), 봉화 정씨(奉化鄭氏), 창녕 성씨(昌寧成氏), 예안 김씨(禮安金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양주 조씨(楊州趙氏), 무송 윤씨(茂松尹氏), 목천 상씨(木川尙氏) 등이 있다.

위와 같이 예를 든 성씨 이외에도 고려 초기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가 많은 것으로 보아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사이에 지방 호족이나 고려의 공신들이 대부분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 받거나 성을 만들어 가졌다고 보여지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성씨 앞에 본관을 표시하여 혈족 계통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성씨는 특권층만 가지고 있었고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성씨가 일반화된 요인 중의 하나는 958(광종 9)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를 들 수 있다.

중국 후주(後周)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한림학사가 된 쌍기(雙冀)의 제안으로 시작된 과거제도는 제도가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성을 가져야 하고 본관(출신지)을 밝혀야만 했다. 더욱이 11대 문종 9년(1055)에는 응시자의 성명, 본관, 4대조까지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여 미리 시원(試院)에 제출하도록 하는 봉미(封彌)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성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성이 없었다.



(5) 조선시대의 성씨(姓氏)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시대의 정책이 계승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민들은 여전히 조선조 초기까지도 성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천민들까지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신분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임진왜란 후부터 한말에 이르러서였다.

임진왜란으로 군사체제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자 그때까지 병역의무가 지워지지 않았던 천민 층까지 모두 징발 당하게 되었다. 이들 천민 층이 전쟁 중에 공을 세우면 평민 신분으로 올려 주었으며 임진왜란 후 사회체제의 변동에 따라 천민들이 하급관리로 등용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양민 층 이상만 가질 수 있었던 성을 노비들까지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됨으로써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으며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다성을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을 새로 만들 때 중국의 성현이나 명문 거족의 성을 사용하여 그들의 후예인 것처럼 자처하는 사대적인 풍조에 젖는 일이 많았으므로 성의 기원이 비록 중국이라 하더라도 그 성을 가진 사람의 조상이 중국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조 때의 영의정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은 우리 나라 성씨의 수를 298성이라 하였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06성이 나와 있다.

 

 

6) 일제 시대의 성씨(姓氏)



한일합방 후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 고유의 것들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썼다. 이의 일환으로 1940년 2월 조선총독으로 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우리 나라 고유의 성씨를 버리게 하고 새로 일본식 성을 만들어 사용하게 강제하였다.

창씨개명에 끝까지 반대하여 우리의 성씨를 그대로 보존하였던 사람도 있었으나 80%나 되는 우리 국민이 창씨개명을 하였다. 그러나 뿌리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우리 민족은 일본식의 두 글자 성을 만들면서도 우리 고유의 성(姓)과 본(本)을 인용하였다.

파평 윤씨는 사까히라(坡平), 히라누마(平沼), 사까이(坡井), 이또오(伊東) 등으로 고쳤고, 김해 김씨는 가네우미(金海)로, 광산 김씨는 미쓰야마(光山)로, 평산 신씨는 히라야마(平山)로, 전주 이씨는 리노이에(李家)나 구니모또 (國本)나 미야모또(宮本) 등으로 고쳤던 것이 그 예들이다.

한편 우리 성씨와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성씨로 성을 바꾼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친일파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압제가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우리 고유의 동성동본의 씨족제도는 붕괴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창씨개명은 해방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 졌고 이전의 성명으로 환원되었다. 

 

 

3. 본(本)의 기원



본은 본관(本貫), 본향(本鄕), 관향(貫鄕), 관적(貫籍), 선향(先鄕) 등으로도부르며, 시조의 출생지나 정착지 등으로 본을 삼았다. 그러나 시조의 발상지가 아니더라도 봉군(封君)이나 사관(賜貫)에 의해 본관을 정하기도 했으며,후손 가운데 어느 한 파가 다른 지방에 나뉘어 거주하면서오래 살게 되면 그 자손들이 독립하여 그 지방을 본관으로 삼은 예도 많았다. 이를 분관(分貫) 또는 분적(分籍)이라 한다.

분관의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은 본래 전라도 곡성 출신이었으나 태조로부터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사 받아 평산 신씨의 시조가되었던 일을 들 수 있다.

성은 같은 조상을 가진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써 다른 혈통의 씨족들과 구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성은 같으나 시조가 다른경우가 많아 씨족의 완전한 구별이 어려웠으므로 성 앞에 본관을 붙여 다른혈통과 구별하고 있다. 오히려 성이 생기기 전부터 본관이라 할 수 있는 부족 이름을 사용하여 같은 씨족임을 나타냈었다.

이러한 출신지가 성과 결합하여 동족을 다른 종족과 구별하는 표시로서오늘날과 같은 본관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대체로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서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였으므로 사족(士族)들 사이에서만 본관이 일컬어졌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따라 일반 서민들까지도 본관을 표시하게 되었다.

원래 같은 성씨라 할지라도 각 성에는 여러 친족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각기 동성의 중앙 귀족과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 신라 말기 골품(骨品)제도가 무너지면서 그런 유대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지방의 친족 공동체들이 각기 분립하여 직계 선조를 시조로 내세워 본관을 달리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경주 김씨나 경주 박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주 김씨는 나주(羅州) 김씨, 의성(義城) 김씨, 언양(彦陽) 김씨, 삼척(三陟) 김씨, 강릉(江陵) 김씨, 울산(蔚山) 김씨, 광산(光山) 김씨, 안동(安東) 김씨 등으로 갈라졌다.

경주 박씨는 밀양(密陽) 박씨, 고령(高靈) 박씨, 함양(咸陽) 박씨, 죽산(竹山) 박씨, 상산(商山) 박씨, 전주(全州) 박씨, 순천(順天) 박씨, 월성(月城) 박씨 등으로 본관이 나누어졌다.한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거주지가 제한되었으며 양민은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서 살았으나 천민들은 향(鄕), 부곡(部曲), 소(所), 처(處), 역(驛), 섬(島) 등에 살았으므로 신분을 표시하는 데 그들의 거주지를 사용하였다. 


천민의 직업은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한 지역에 집단을 이뤄 살았으므로 그 거주지는 그들의 혈연적 집단의 신분을 표시하는 본관의 구실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은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며,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론일 뿐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이 같으면서도 성과 본관이 다른 성씨가 많은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이 같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본관(本貫)과 성(姓)과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① 동조 동본 동성(同祖同本同姓)

같은 시조에 같은 본, 같은 성을 사용하는 경우로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다.

② 동조 동본 이성(同祖同本異姓)

같은 시조에 같은 본이나 성을 하사 받거나 그 밖의 이유로 성이 달라진 경우이다. 가락국의 수로왕 후손으로 김해의 본을 쓰면서 김해김씨와 김해 허씨(金海許氏) 등으로 갈려 사용하는 경우다.

③ 동조 이본 동성(同祖異本同姓)

같은 시조의 후손이면서 본을 다르게 쓰고 있지만 성은 같은 경우다. 파평 윤씨의 시조 신달(幸達)의 후손이면서 남원(南原), 함안(咸安), 덕산(德山), 신령(新寧) 등으로 각각 다른 본을 사용하고 있으나 성은 같은 윤씨를 사용한다., 또 신라 알지왕의 후손으로 강릉, 광산 등 본은 달라도 성은 같은 김씨를 사용한다.

 

④ 동조 이본 이성(同祖異本異姓)

원래 동족이지만 성과 본관을 다르게 쓰고 있는 경우이다. 김해 김씨와 양천 허씨, 인천 이씨와 문화 유씨, 연안(延安) 차씨 등이 그 예이다.

⑤ 이조 동본 동성(異祖同本同姓)


시조가 다르면서 본과 성이 같은 경우다. 수로왕계의 김해 김씨와 일본계로 임진왜란 때 귀화한 김충선(金忠善)계 김해 김씨가 그러하며, 남양 홍씨(南陽洪氏)에는 시조가 다르다 하여 당홍(唐洪)이라 부르는 남양 홍씨와 토홍(王洪)이라 부르는 남양 홍씨가 있다.

⑥ 이조 동본 이성(異祖同本異姓)


시조가 각각 다르므로 성도 다르지만 시조의 발상지가 같아서 본이 서로 같은 경우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와 경주 손씨(孫氏), 청주 이씨와 청주 한씨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⑦ 이조 이본 동성(異祖異本同姓)


시조가 다르므로 본도 다르나 성이 같은 경우다. 파평 윤씨와 해평 윤씨(海平尹氏), 안동 장씨와 덕수 장씨, 광주 이씨(光州李氏)와 연안 이씨 등이 그러하다. 이족이라면 성과 본관을 다르게 쓰는 것이 마땅 하겠지만 한 지방에 여러 성씨가 연고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1999年 韓國姓氏史料硏究院 發行 譜學便覽 拔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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