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鄭述)의 이 제안은 그 뒤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하여 기존의 박팽년 사당 외에 별도로 세워진 별묘가 지금의 묘골 육신사의 모태가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40년 전에 처음 세워진 별묘 하빈사(河濱洞)가 현재의 육신사로까지 변모해온 과정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참고로 「낙빈서원기」에 따르면 1675년 [숙종 1]에 선생의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낙빈사(낙빈서원기에는 하빈사가 아닌 낙빈사로 되어 있다).`를 세웠으며, 1694년 [숙종 20]에 비로소 낙빈서원으로 사액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66년 고종 3]에 낙빈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다. 훼철 당시 그 동안 모셔왔던 여섯 위패는 서원 뒷산에다 묻었는데 지금의 낙빈서원바로 뒤편이다. 이렇게 하여 수 백 년 내력의 낙빈서원은 빈 터의 상태로 58년이란 세월을 무심히 흘려보냈다.
일제(日帝) 강점기였던 1924년, 낙빈서원은 지금의 자리에 사당 없이 작은 규모로 복원이 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지금도 낙빈서원은 강당만 복원되었을 뿐 사당과 동·서재 등은 미복원 상태이다. 참고로 낙빈서원은 조선 조 대구에 다섯 개 밖에 없었던 사액서원 중 한 곳이다.
어쨌든 1924년에 복원된 낙빈서원에는 사당이 없다. 하지만 사당이 없다하여 제사를 모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석채례(釋葉禮)`라고 하여 향사(享祀)보다는 격이 조금 낮지만 사육신에 대한 제사는 여전히 이곳 낙빈서원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다. 그러던중 1982년 5월 20일, 무려 11년여에 걸친 묘골 육신사 유적정화사업이 최종 결실을 보았다. 이로써 낙빈서원에서 행해오던 사육신에 대한 제사가 육신사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 박계창의 꿈에서부터 시작된 육신사의 내력이다.
`박팽년 사당→하빈사[낙빈사] → 낙빈서원→철폐→ 낙빈서원→ 육신사`
낙빈서원기(洛濱書院記)
대구(大邱)의 하빈(河濱)은 곧 참판(參判) 박팽년(朴彭年)의 자손이 살고 있는 땅이다. 1456년 [병자. 세조 2년]의 화란 후에 취금헌 박팽년(朴彭年)의 자부(子婦) 이씨(李氏)가 친정고향인 대구에 붙여 살기를 원하였으므로, 자손이그대로 이곳에 살았다. 박 선생의 현손인 계창(繼昌)이 선생의 기일(忌日)[음6월 초7일] 잠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여섯 선생이 함께 대문을 들어오시는꿈을 꾸고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감창(感)하여 따로 오위(五位)를 베풀고는일체(一體)로 향사(享祀)를 드렸다.
한강(寒岡) 정구(鄭述)가 말하기를 “오위는 사삿집에서 향사(享祀)함은 제례(祭禮)에 마땅치 않으니 마땅히 별묘(別廟)를 세워서 함께 향사(享祀)함이 옳을 것이다.”하였다. 이에 숙종 원년 [1675년에 사림(士林)이 박 선생의 사당에서 멀지 않는이곳에다 낙빈사(洛濱祠)라는 별묘(別廟)를 세워 향사(享祀)를 지내오다 숙종20년[1694년에 도내 유생(儒生)들의 소청(疏)으로 사액(賜額)을 받아 낙빈서원(洛濱書院)이 되었다.
고종 3년 [168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있으며 그때 여섯선생의 위패는 서원 뒷산에다 매혼(埋魂)하였다. 그 후 1924년 유림(儒林)에 의해 이 자리에 낙빈서원(洛濱書院)이 복원되었으며 다시 이곳에서 육선생의 향사(享祀)를 지내오다, 1974년 충효유적(忠孝遺蹟) 정화사업에 따라 묘골 구 종가 터 뒷산에다 육신사(六臣祠)를 짓고 거기에서 매년 추향(秋享)을 봉행(奉行)하고있다.
『순천 박씨 충정공파 파보』 권지1」, 184-185쪽
(2) 300년 전 옛 시에 나타난 ‘묘동과 ‘육신사`
필자는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근무하면서 묘골이라는 마을이름의 유래에 대해수없이 많이 해설을 해본 경험이 있다. 대체로 이런 식의 해설이다.
“현재 묘골은 한자로 竗谷·竗洞`으로 씁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묘할 妙자와는좀 다르지요. 竗자는 땅이름 묘라는 글자인데 그 의미는 妙자와 비슷합니다. 여하튼묘골이라는 동명(洞名)은 묘하다는 뜻에서 묘골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옛 사람의생각에는 어쩌면 자신이 사는 동네 이름에 `女자가 들어가는 것을 꺼렸을 수도 있었을겁니다. 그래서 妙가 竗로 대체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묘골은 풍수지리적으로도 묘하고, 박일산[박비이 이곳에서 태어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도 묘하고, 그로인해 이곳이 560년 내력의 묘골 박씨 세거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묘하죠. 이처럼묘골은 이것저것 다 묘하다고 하여 묘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묘를 사당묘(廟)`로 보아 ‘묘廟)골`이라고도 합니다. 옛날부터 이곳 묘골에 사육신을 모시는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