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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충경공(忠景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7-31 09:56:14       조회수 : 509 파일 :



 

◎ 충경공(忠景公) 휘(諱)량(亮) 묘갈명(墓碣銘)


역 문(譯文)-

忠景公 柳 亮 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량(亮)이요, 자(字)는 명중(明中)이다.

그 선세(先世)는 문화인(文化人)으로 대승공 휘 차달(大丞公 諱 車達)이 계시어 고려(高麗) 태조(太祖: 王建)가 남방으로 백제(百濟)를정벌(征伐)할 때 공이 수레를 내어 통일(統一)을 힘써 도운 공(功)으로 공을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사호(賜號))하고 관직이 대승(大永) 벼슬을 내리셨다.

자손이 여러 대(代)를 이어 훌륭한 관직이 많이 나므로써 삼한(三韓)의 대족(大族)이 되었으니 이를테면 참지정사 시호 문간공(參知政事 賜號 文簡公) 휘 공권(諱 公權)과 우복야 한림학사(右僕射 翰林學士)휘 택(諱 澤)과 첨의참리 시 정신공(僉議參理 諡 貞愼公) 휘 승(韓 陞)이요, 증조(曾祖)는 휘 인기(諱 仁琦)니 문화군(文化君)으로 시 온정공(諡 溫靖公)이요, 조(祖)는 휘 보발(諱 甫發)이니 밀직 대언(密直代言)이요, 고(考)는 휘 계조(諱 繼祖)니 공민조(恭愍朝)에 출사(出仕)하여 관직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으르렀는데 강의(剛毅)한 칭성이 있었으며, 비(妣)는 혜순텍주(惠順宅主) 구씨(具氏)니 대광(大匡) 면성군 영검(沔城君 榮儉)의 따님이다.


공께서 원(元)나라 지정(至正) 을미(乙未:1355), 즉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 4년 12월 22일에 태어나셨다. 15세에 산원(散員)에 제수(除授)되고, 17세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及第)하였는데, 재질(才質)이 뛰어나 동배(同輩)의 추중(推重)한바 되었다.

20세에 부친상(喪)을 당하여 모친을 모시면서 학문에 힘쓰더니, 27세되던 홍무(洪武) 신유년(辛酉年)에 흥위위호군(興威衛護軍)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직(辭職)하고, 과거(科擧)에 응시(應試) · 갑과(甲科) 제일인(第一人)으로 급제(及第)하였다.

동년(同年) 겨울 전의 부령 지제교(典儀副令 知製敎)에 임명되어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봉상대부(奉常大夫)를 겸하다가 갑자(甲子)에 전리(典理)에 옮기고, 정묘(丁卯)에 중정대부(中正大夫)에 승진(陞進),사복정(司僕正)에 임명되었다. 무진(戊辰) 정월에 본관으로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성망(聲望)과 공적(功績)이 있었으며, 부(部)에 있어 전교령(典校令)에 옮겼다가 만기(滿期)가 되어 조정(朝廷)으로 돌아와서 중정대부 천우위대호군(中正大夫 天牛衛大護軍)에 제수(除授)되었더니 비순위(備巡衛)로 옮겨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임명되었다.

기사(己巳)에 봉순대부 종부시 판사(奉順大夫 宗簿侍判事)에 승진하여겨울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종실 왕방(宗室 王防)을 수행, 중국에 갔는데, 마침 참소(讒訴)하는 자가 있어 말을 꾸며 상국(上國)에 고변(告變)하는지라, 공이 사리(事理)에 따라 변명하고 조정(朝廷)으로 돌아오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임명하시었다. 그후 판내부(判內府)로 옮겼다가 전교(典校)에 옮기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승진하였는바, 등제(登第) 이후로 중방(重房)에 있을때가 아니면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대(兼帶)하였다. 임신(壬申)에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옮겼다가 곧바로 이조전서(吏曹典書)에 특배(特拜)되고, 계유(癸酉)에 중추부(中樞府)에 올라 관동(關東)에 관찰사(觀察使)로 나갔으며, 갑술(甲戊)에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학사(學士)로 형조전서(刑曹典書)를 겸하고, 상의 중추(商議中樞)에 옮겨 그대로 형조전서를 겸임하였다.

을해(乙亥)에 조선 태조(朝鮮 太祖)가 공이 일찍이 천명(天命)을 알고, 임금되기 전에 오래 모셨다하여 어명(御命)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참록(參錄)토록 하고 전(田) 30결(結)과 노비(奴婢) 6인(六人)을 하사(下賜)하셨다. 병자(丙子)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고, 정축(丁丑)에 상의 중추(商議中樞)로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다가 왕명으로 부름을 받아 돌아왔더니 참소(讒訴)를 입고 나주(羅州)에 귀양되었다. 무인(戊寅) 9월에 명(命)을 받아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가 다스리니, 백성들이 사모하여 생사우(生祠宇)를 건립하고, 기묘(己卯) 12월에 체환(遞還)하여 참지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

태종 원년(太宗 元年) 신사(辛巳)에 임금을 도운 공(功)을 논(論)하여 좌명 4등공신(佐命四等功臣)에 책록(策錄),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號)를 내림과 아울러 전(田) 60 결과 노비 6인과 백금(白金),문기(文綺), 구마(馬) 등을 하사(下賜)하였다.

얼마 후에 병(病)으로 사직(辭職)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곧 문성군(文城君)을 봉(封)함에 더욱 굳이 사양하였다. 갑신(甲申)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임명하되고 다시 참판(參判) 사평부사(司評府事)로써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임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진하였다. 을유(乙酉)에 형조판서 (刑曹判書)에 임명되었다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옮기고, 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옮겨 전의(典醫)를 겸임하였다. 병술(丙戌)에 다시 형조판서(刑曹判書)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임명되고, 정해(丁亥)에 예문관대제학(大提學)으로 참찬(參贊)에 제수 되었다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옮기었다. 무자(戊子)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직제학(直提學) 어변갑(魚變甲) 등 33인을 선발되고, 다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옮겨,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 시론(時論)에 맹종(盲從)하지 않았다.

기축(乙)에 이조판서(吏曹判)로 옮겨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고 다시 참찬으로 옮겨 대사헌을 겸임하다가 얼마 후에 또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승진하였다.

경인(庚寅)에 다시 구봉(舊封) 문성군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에 승진했더니 곧바로 찬성으로 체임(遞任)되어 다시 구봉으로 판순금사(判巡禁司)를 겸임하도록 하니, 병으로 굳이 사양하였다. 을미(乙未) 6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제수(除授)되었는데 8월에 병으로 굳이 사양하니, 10월에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을 봉하여 양질(養族)을 허락하였으나, 공(公)이 오히려 병환이 심하여 즉시 수명(受命)하지 못하거늘 12월에 전명(前命)을 고쳐 공신(功臣)에 동덕(同德)의 호(號)를 더하여 내리었다.

공께서 기질(氣質)이 굳세고 조급하여 발지와 등창으로 오래 고생하더니 병신(丙申) 2월에 모친(母親) 구씨(具氏)가 돌아가시고, 장자(長子) 좌(左)마저 죽어 거듭 애척(哀慽)이 심하던 중, 등창이 다시 발생하여 4월 초2일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62세였다.

부음(音)이 들림에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사 집에 치제(致祭)를 명(命)하심과 아울러 충경(忠景)으로 시호(諡號)를 내리고 부조(不桃)의 은전(恩典)을 베푸시었다. 동년 9월 18일(丙午日)에 양주 와부면 시우리(陽州 瓦卓面 時雨里) 癸坐(계좌)의 언덕에 국장(國葬)으로 모시었다.

공께서 성품이 너그럽고 솔직하여 마음 속에 쌓은 담이 없고, 임금를 섬김에 한결 지성(至誠)을 다하고 정사(政事)를 베풀메 대체(大體)를 힘써 꽃아 변경(變更)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접(接)함에 마음을 열어 성의(誠意)를 보였으나, 의리(義理)를 범(犯)함에 이르러선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다. 그 공훈(功勳)을 책록(策錄)한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뛰어난 자질(資質)과 큰 도량(度量)으로 성명(性命)을 배우고 공리(功利)를 물리쳤도다. 과거(科學)에 장원(壯元)하여 크게 명성(名聲)을 떨치고 자모(慈母)를 봉양함에 능히 효성(孝誠)을 폈도다. 그 배양(培養)한 본심(木心)이 확연히 꺽이지 않아 사업(事業)을 조처함에 여유가 있었도다.

온화한 성품은 도(道)에 가까운 순이(濟史)의 기풍이 있었고, 활달한 의지는 남보다 뛰어나 재상(宰相)의 도량이 있었도다.

세 번 중국(中國)에 사신(史臣)을 갔는데 중화(中華)의 선비들이 전대(專對)의 재주라 칭찬하고, 두 번 변방(邊方)에 수령(守令)으로 갔는데 홀아비와 과부들이 혜선(惠鮮)의 은택을 입었도다. 경(卿)의 재략(才略)이 그 문학(文學)과 정사(政事)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는바,하늘에서 이사람을 내어 큰 명(命)을 붙들지 않았다면 능히 이 같으랴!

임금께서 내리신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관작(官爵)이 훌륭한 명문(名門)의 후예(后裔)로써, 남에게 굽히지 않은 위대한 재주로다. 일찍이 높은 과거(科舉)에 급제하여 큰 관직을 두루 지냈도다.

선왕(先王)에게 출입(出入)하여 노고(勞苦)를 다하고, 짐(朕)을 익대(別數)하여 왕업(正業)을 도왔도다. 충직(忠直)한 자품은 실로 천부(天賦)에 근본하고 정륜(經論)의 도량은 곧 백성(百姓)에 부응 했도다. 뛰어나게 고인(古人)의 기풍(氣風)이 있었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절조(節操)가 있었도다. 이로써 승진(陞進)시켜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는데 실로 의지 하였도다. 게옥(啓沃)이 근실함을 오히려 바탕하여, 영성(成)의 업적을 능히 세웠도다.

초배(初配) 평양조씨 (平壤趙氏)는 증 시중(贈 侍中) 덕유(德裕)의 따님으로, 2자(二子)를 낳아 좌(佐)는 전사령(典社令)이요. 근(謹)은 한성 소윤(漢城 少尹)인데 부인(大人)과 2자(二子)가 모두 먼저 졸(卒)하였으며, 계배(繼配) 연안이씨(延安李氏)는 공조전서(工曹典書) 원발(元發)의 따님으로 세종 갑인(世宗 甲寅) 정월 초9일 에 졸(卒)하여 묘소는 부좌(祔左) 쌍봉(雙封)으로 모시었고, 3子를 낳아 경생(京生)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요, 4 강생(江生)은 현감(縣監)이요, 5子 한생(漢生)은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이다.

좌(左)의 남(男)은 상영(尙榮)이니 감찰(監察)로 중 좌찬성(左贊成)이며, 경생(京生)은 5남을 두어 찬(徽)은 현감이요, 세(繐)는 부사요, 적(績)은 현령이요, 집(輯)은 사정(司正)이요, 진(縉)은 사직(司直)이며, 강생(江生)은 2남을 낳아 수(綏)는 부정(副正)이요, 신(神)은 대호군(大護軍)이며, 한생(漢生)은 6남을 낳아 훈(纁)은 군수요, 륜(論)은 군수요, 채(採)는 목사(使)요, 작(韓)은 군수요, 약(約)은군수요, 인(絪)은 생원(生員)이다. 이하는 번거로워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공(公)께서 별세 하신지 오백년(五百年)이 되었으나, 묘소에 비(碑)를 아직껏 세우지 못했더니 종손(宗孫) 훈(纁)이 여러 족인(族人)과 합모(合謨), 돌을 다듬어 장차 묘전(墓前)에 비를 세우고자 설제학(偰提學) 순(循)이 지은 행장(行狀)을 삼가 등초(騰抄)하여 글을 청하는바, 이에 경재(敬齋) 하문효공(河文孝公) 연(演)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인용(引用)하여 명(銘)에 이르노니,

『우리의 존귀(尊貴)하신 공(公)이시여! 하늘에서 내신 뛰어난 분이로다. 덕(德)을 숭상하고 업(業)을 넓히시어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도다. 맑은 기개(氣槪)와 온화한 심성(心性)은 가을 달과 봄 볕과 같았도다. 내외직(內外職)을 두루 역임하시어 명성과 공적이 참으로 빛났도다. 나라를 도운 충성스런 공훈은 백세(百世)토록 방명(芳名)이 전하리로다. 아름다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자손이 그토록 창성하도다.』

(註)
찬자(撰者) 죽당공 휘 인봉(竹堂公 諱 寅鳳)

공은 충경공의 3子 판윤공 경생의 16代孫으로 회양부사(准陽府使) 휘 세(繐)의 2子 휘 흥손(興孫)의 손자이며, 화영(華永)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1910년10월 12일 ~ 1973년 3월 14일 졸, 묘는 강릉 왕산면 대기리 선영 하 손좌. 한문학(漢文學)과 사학자(史學者). 성균관대학 한학 강의(講義)하였다. 위선(爲先)과 종사(宗事)에 전력(專力)하여 충경공종중약장(忠景公宗中約長), 대동보(大同譜) 족보편찬, 선대 묘비문(先代 墓碑文)을 여러 편 찬(撰). 성곡공 비문도 찬(撰)하셨다.


※ 남양주시지: 문화재와 인물편.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 흥지승람(興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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