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屛 山 書院 紀行 류두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18 15:56:12       조회수 : 417 파일 :

     所在地 安東市 豊川面 屛山里30


 (一) 머리 말씀


陶山書院의 곳곳을 두루 見學을 마치고 곧 바로 豊川面 所在의 屛山書院으로 急히 왔으나 午後 4時가 지나서야 겨우 書院 앞의 廣場에 到着하였다.
늦은 時間인데도 駐車場에는 많은 車輛들과 觀光客들로 가득했는데 거의 大多數가 젊은 男女들이였다. 아마 秋夕連休를 맞아 觀光온 사람들로 보였으니 古蹟에 關心을 가져 주는 것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二) 屛山書院 (史蹟第260號)


書院으로 가는 途中 느낀 바는 現在와 같이 곳곳의 道路整備가 잘되어 往來가 便할때인 데, 이곳은 大道路를 벗어나 書院으로 가는 길은 옛 그대로 擴張이나 鋪裝도 되지 않아 달리는 車에 흙먼지가 많이 날렸다. 本 書院은 陶山書院과 같이 雄大치 않았으나 많은 建物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一部 建物에는 懸板이 없는데도 있었다. 特히 아직 淨化가 되지 않아 옛 그대로 인 듯 건물들도 退色되고 뜰 안 곳곳에는 빗물에 흙이 流失된 狀態 그대로 있었다. 管理人이 怠慢했음을 느꼈다. 管理委員들이 어찌 淨化 補修치 않았는지? 안타까움 마저 들기도 했다. 境內 造景은 잘되어 있는데 그 樹種이 多樣치 못하고 그중 배룡나무가 많기도 하려니와 매우 큰 나무로 자란 것이 곳곳에 있었으며 그리고 朱木도 많았는데 모두 洋傘型으로서 그 幅이 8~10尺은 됨직해 보였다. 또 外部 넓은 곳에는 크게 잘 자란 명자나무가 많았고 그 外는 소나무가 大部分 이었다.


(三) 尊德祠


書院內 最上段部에 있는 尊德祠는 西厓公의 位牌를 奉安한 祠堂으로 光海君6年 甲寅(1614)에 儒林에서 建立한 것으로, 뒷날 仁祖13年 乙亥(1635)에 下世한 公의 3子 修巖公 諱 袗의 位牌도 함께 奉安했으니, 그는 光海君2年 庚戌(1610)에 司馬試에 及第하고 五個邑을 歷典하고 司憲府 持平에 이른 후 돌아가시니 參判을 贈했다 한다.


(四) 豊原府院君 諡 文忠公 西厓 柳成龍


本 書院은 西厓公을 配享한 書院이니 먼저 西厓公의 身上을 簡略히 살펴보기로 한다. 公은 豊山柳氏 13世로 祖는 郡守公 諱 公綽이며 考는 黃海觀察使 諱 仲郢으로 生2男하시니, 長은 號 謙菴 諱 雲龍이시며, 公은 次子인데 中宗37年 壬寅(1542)10月1日 外家인 慶北義城縣 沙村里에서 태어나셨고, 明宗13年 戊午(1558)에 廣平大君(世宗의 五子)의 五代孫인 李坰(경)의 따님과 結婚했다. 幼年期부터 退溪先生門下에서 修學하셨는데, 21歲때인 明宗17年 壬戌(1562)에 스승님의 著書인 近思錄을 傳授받으셨다. 2年뒤인 23歲때에 進士試에 及第하고, 뒤이은 25歲때 栗谷 李珥와 同榜으로 文科及第하고 翰林에 入選되었다.
年28歲때에 司憲府 監察에 就하고, 以後 累進하여 여러 官職을 歷任한후 觀察使, 禮曹, 刑曹, 兵曹判書를 거쳐 宣祖23年 庚寅(1590) 5月에 年49歲로 議政府 右議政에 오르시고, 다음해 2月에 左議政에 除授되고, 그해 7月에 나라의 앞날에 對備하여 能力있는 將材를 薦擧하시니 바로 全羅 左水使에 李舜臣을 또 義州 牧使에 權慄을 登用케 했으니 뒷날 壬辰倭亂을 勝利로 이끈 水陸 두분 將軍이셨다.


(五) 壬辰倭亂期


壬亂때인 宣祖25年 壬辰(1592) 5月에 年51歲로 領議政에 除授 되었으나, 一部層의 謀陷으로 罷職되었다가, 다음해의 10月에 다시 領議政에 除授되었다. 이때는 壬亂으로 어려운 때였는데 倭賊이 서울 近郊까지 進擊해옴에 宣祖께서  危機를 避하여 平壤으로 가시고, 東宮(光海君)은 江原道로 避해 갈 때인데, ,援軍으로 온 明나라의  李如松 將軍이, 兵을 平壤城 外廓에 駐屯시킨체 積極的으로 戰鬪로 倭賊을 물리칠 計策은 새우지 않고, 消極的인 臨時 防禦策만 쓰며, 本國의 訓令을 기다리는 中이며, 明나라에서는 朝鮮의  戰況을 살피기 爲하여 使臣을 보내어 戰勢를 살피다가, 朝鮮의 어려운 處地를 妙하게 惡用하여 將次 朝鮮을 그들의 屬國으로 만들 野心으로, 宣祖임금을 退位시키고, 그네들이 直接 朝鮮을 統治하겠다는, 國書를 보내 왔을 때, 平壤行在所에서는 이 問題를 御前會議 한바 現在의 危機 打開策은 달리 없음에, 明나라로 亡命해 가고 本案을 받아들이자고 하는 一部意見이 나왔으니, 西厓公은 이를 極力反對하며 끝까지 나라를 지켜야 옳다는 意見을 밝히니, 끝까지 死守키로 決定되어 나라를 지키게 되었다고 傳해진다.


(六) 懲毖錄 (國寶第 132號)


宣祖31年 戊戌(1598) 10月19日 露粱海戰에서 三道 水軍統制使 李舜臣 將軍이 流彈으로 쓸어 지시고 11月에 기어히 世上을 뜨셨다. 이에 朝廷에서는 李舜臣을 將材로 薦擧한 責任을 물어, 그해 12月에 모든 官職을 削奪 當하시고, 다음해인 58歲때 2月에 河回 鄕里로 돌아 오셨다. 이후로는 故鄕에서 餘生을 보내게 되셨는데, 壬辰倭亂 前後事와 宣祖37年 甲辰(1604)까지 內容을 回顧하여 “지난날을 懲戒하여(懲前) 앞날에 對備한다(毖後)는 뜻으로 내가 懲毖錄을 쓰
는 所然이 여기에 있다”고 하시며 自筆 回顧錄을 남기셨으니, 本 回顧錄은 國寶 第132號로 指定 되었다. 그後 宣祖40年 丁未(1607) 5月6日 享年66歲로 鄕內의 弄丸齋 草堂에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文忠公이라 諡號하다. 墓는 安東市 壽洞里 後山 子坐原에 安葬했었는데 뒷날 그 長孫인 拙齋公 諱 元之께서 壽洞里 中洞 丁向之原으로 緬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七) 忠孝堂 (寶物 第414號)


西厓公께서 草家 三間인 弄丸齋 草堂에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公을 欽慕하는 後學들과 儒林에서 옛 弄丸齋 舊址에 公을 기리기 爲한 忠孝堂(總 五個棟 建物)을 建立하였다., 그 堂號를 忠孝堂이라 한 것은 公께서 平素하시는 말씀이 “나라에 忠誠하고 父母님께 孝道하라”고 하시던 말씀에 따른 것이라 하는데, 堂號인 忠孝堂이란 懸板은 眉叟先生 陽川后人 許穆(1595生~1682卒 肅宗朝 右議政이며 吾里 李元翼의 女壻이며 諡 文正公이다)의 親筆이라 하다. 뒷날의 그 遺品展示館인 永慕閣도 本 忠孝堂 뜰안에 자리하고 있다.


(八) 永慕閣


本 內容은 書院에 關한 것은 아니나 書院에 配享되신 西厓公의 遺品展示館이라 여기에 言及한다. 己巳(1965)9月에 朴正熙大統領께서 “西厓先生의 遺物 保存館을 새로 建立하여 모든 文獻과 遺物을 一般에게 公開하라”고 하시며 遺物展示館 建立費로 쓰도록 주신 下賜金과 慶北道 및 安東郡의 補助金과 後孫들의 誠金으로 展示舘이 建立되고 朴大統領의 親筆인 永慕閣이란 懸板도 달게 되었다. 그러나 建物이 狹小하여 遺物全部를 展示하기가 어려움을 알게 되신 令夫人 陸英修 女史께서 再建立의 費用을 주셔서, 1973年 5月에 着工하여 1975年 10月에 總 57坪의 새로운 永慕閣이 竣工되어 1977年6月9日 뜻 깊은 開館으로 遺物들이 一般에게 公開되었는데, 本 建物의 構造는 濕氣防止를 爲하여 마치 樓閣型으로 建立햐여, 위는 展示場이고 밑은 空氣流通을 爲한 空間으로 되어있어 마치 2層建物과 같이 보인다. 永慕閣 앞뜰에는 萬枝松(盤松의一種)이라는 標抹이 붙은 큰 소나무가 基部(밑둥치)에서 數많은 가지가 뻗어나가 크게 잘자라고 있었다.


(九) 河回 民俗村


以上으로 두루 見學을 마치니 벌써 日沒이 가까웠기에 參觀日程을 잡았던 河回마을 民俗村에는 時間이 쫓겨 들리지 못했으나 數年前에 一次 다녀온 적이 있어 그 重要 內容은 알고 있으니 그곳의 觀光은 다음 기뢰로 미루었다.
本 河回 마을은 洛東江이 마을을 감싸 안고 돌아 흐르기 때문에 河回마을이라 했다. 이곳은 豊山 柳氏의 集成村이며, 先代인 工曹典書 諱 從惠공이 처음 入鄕하셨다 하며 뒷날 많은 有名人士와 大儒學者이신 謙菴公 諱 雲龍先生과 西厓相公으로 더욱 世間에 잘 알려진 마을로서 慶北道의 民俗資料 第23號로 指定되고 國家重要 民俗資料 第122號로 指定되었으며, 史蹟으로는 謙菴先生의 古宅인 養眞堂(306號), 西厓公 宗宅인 忠孝堂(414號), 謙菴 宗家 遺物, 西厓公 宗家 文績, 重要 無形文化財인 河回 별신굿 탈놀이 等이 있으며 또 西厓公35歲때에 遠志精舍와 燕坐樓를 지어 學問을 닦던 곳으로서 “處卽 爲遠志요 出 卽 爲小草”라는 古事를 引用한 建物이라 傳해진다. 外에도 數많은 古宅이 傳해지고 있어 “河回民俗村”이라 하나 以下 古宅의 內容을 省略키로 한다.

 

(十) 附記


本 內容은 屛山書院과는 直接關係가 없기는 하나 西厓公의 親兄任이시라 參考로 여기에 簡略히 記述한다.
謙菴公 諱 雲龍先生은 西厓公에 못지않는 大儒學者이시며 또 至極한 孝子이신데 中宗34年 己亥(1539)에 태어나시고, 幼時부터 退溪先生 門下에서 修學하시니 退溪先生께서 그의 誠實하고 篤實함을 稱讚하셨다 한다. 成年後에도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나 親命으로 宣祖5年 壬申(1572)에 蔭仕로 仁同縣監으로 在任中 옛날 善山府 鳳溪 胎生이신 冶隱 吉再先生의 墓를 重修하고 祠宇와 書院을 建立하여 敎化에 힘썼다. 壬亂때는 豊基 郡守를 거쳐 原州 牧使로 在任中 親患으로 辭退하고 그 看護와 侍湯에 誠을 다한 孝子였다 한다. 晩年에는 書室을 江岸에 세워 朝夕으로 學問에 沈潛하시고 도 後學을 가르쳤으며, 宣祖34年 辛丑(1601)에 享年63歲로 돌아가시니 吏曹判書를 贈하고 文敬이라 諡號하다.


(十一) 後記


本 書院도 餘他 書院과 같은 賜額書院인데 他書院에 比하면 淨化補修가 미처 되지 않아 院內의 곳곳에 補修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補修치 못한 事情은 있었겠지만 조속히 淨化補修 되기를 期待해 본다. 아쉬웠던 것은 公墓에 省墓할 時間이 없어 끝내 못간 일이다. 언제 또다시 機會가 있을지 모르겠다, 以上으로 拙稿를 줄이면서 元來부터 모자라기만 한 知識인데 더욱이 못하여入手치  本內充分한 關係 資料마저 容이 充實치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註) 지난 2014年5月 中旬頃 中央 第一放送(k,b,s)뉴스時間에 西厓 柳成龍 先生께서 配享된 屛山書院의 賜額을 申請했다고 報道했으니. 이는 잘못 알고 한 것으로 본다. 卽 文化柳氏寶鑑 附錄編 438쪽의 朝鮮王朝 實錄中 哲宗14年 癸亥 1863年頃에 依하면, 11月에 屛山書院이 賜額되었다는 記事가 登載되어 있어니 k,b,s의 誤報라 본다.         

 

 

歲 癸巳 2013年 9月 25日
 大邱宗會 常任顧問 淸泉   斗  烈  拔萃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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