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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 山 書院 紀行 류두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18 15:55:10       조회수 : 433 파일 :

 所在地  安東市 禮安面 土溪里680


(一) 머리먈     (註)~以下 全文은 關係文獻을 拔萃한것임


오래 前 부터 陶山과 屛山 兩 書院을 見學코자 했으나 그 동안 줄곧 期會가 닿지 않았는데 이번 秋夕 連休를 期하여 申壻君의 도움을 받아 그의 車로 두 사람이 함께 安東을 향해 떠났다. 9月 20日 午前 9時半頃 出發하여 10時頃 漆谷近處에서부터 公園墓地 省墓客들의 車輛들로 甚한 停滯가 이어졌는데 架山을 지나니 多少 나아졌다. 安東에 到着하자 正午가 다되었다. 곧 바로 案內板을 살피며 目的地인 禮安面 土溪里 所在의 陶山書院을 찾으니 連休 때문에 넓은 駐車場엔 車輛들로 가득했고 많은 觀光客으로 붐볐다. 一見하여 그 規模가 雄壯함을 느꼈다.
本 書院의 初期는 退溪 又號 陶溪公 眞城后人 李滉先生께서, 明宗16年 辛酉(1561)부터 連4年에 걸쳐 손수 지으신 陶山書堂으로서 先生께서는 이곳에 居處하시며 後學들을 가르치시던 곳인데 居處하셨던 房을 “琓樂齋”라 하고 마루는 “암여헌‘이라 했다 한다. 그 後 現書院 建物은 門人과 儒林에서 宣祖7年 甲戌(1574)에 着工하여 2年後인 同9年 丙子(1576)에 完工되었는데 宣祖께서 乙亥(1575)에 賜額하여 ”陶山書院“이라 하고 顯額은 石峯 韓濩(書藝大家로 淸州 后人인데 中宗38年 癸卯(1543)生이고 享年63으로 宣祖38年 乙巳1605年 卒)의 글씨라 하다. 뒷날 庚戌(1970)에 政府에서 書院을 補修淨化하여 聖域化 했다 하는데 建物은 모두 30個棟이며 史蹟 第170號로 指定되었다.


(二) 先生任의 身上


先生任은 眞城 李氏 后로 考位 進士 諱 埴과 妣位 順天 朴氏의 生5男中 막네아들로 燕山君7年 辛酉(1501)에 陶山面 恩惠里에서 태어나시고, 生後 7個月 되던때 不幸히도 考位께서 돌아가시니,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6歲때부터는 禮儀바르고 謙遜하여 또래 아이들도 그를 두려워하며 잘 따랐다고 한다. 12歲때 부터는 叔父이신 松齋公 諱 瑀에게 論語를 배웠으며 글의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19歲때는 周易을 읽고 中宗18年 癸未(1523)때 成均館에 入學하였다. 그러나 官職은 願치 않았으나 어머니의 勤으로 中宗29年 甲午(1534)에 文科에 及第하고 承文院 副正字부터 戶曹佐郞을 거치는 동안, 金安老 一派의 妨害로 昇進치 못했는데 不幸하게도 中宗33年 戊戌(1538)에 母親喪을 當하여 3年 服制를 마치고 金安老가 失權하자 弘文館 修撰으로 玉堂에 選入되었다.
그후 累進하고 여러 官職을 거쳤으나 乙巳士禍(1545)때 官職에서 罷職되어 쫓겨났다. 明宗2年 丁未(1547)에 다시 應敎를 거쳐 豊基郡守로 在職中 身病으로 물러나 故鄕에서 書堂을 짓고 讀書와 思索을 했었다. 이때 “朱子書節要”를 編纂하고 더하여 朱子學과 그 弟子들의 學文을 硏究하므로서 59歲때인 明宗15年 庚申(1560)에 “송계지명”과 “理學通論”이란 冊을 刊行하고 詩集인 “陶山12曲”도 刊行했다. 이때 나라의 召命을 받아 大司成, 副提學等을 歷任하고, 나이 어린 宣祖가 卽位하자 ”聖學十圖“를 지어 王에게 올리고는 官職에서 물러나 故鄕으로 내려와서는 질그릇을 使用하고 배옷을 입는 等 儉素한 生活을 했으며 陶山書堂을 지어 弟子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特히 弟子中 奇大升과는 8年間이나 學文을 討論하는 書信을 交換했다 한다. 뒷날 先生의 著書인 ”朱子書節要“等 많은 冊들이 日本에서도 出刊되었다고 한다. 그 後에도 數次에 걸쳐 나라에서 召命했으나 不就하니 再次 召命하여 大司成 副提學, 禮曹判書등을 拜했으나 모두 不就하셨다. 그 後 또다시 明宗10年 乙巳(1555)에 資憲大夫 工曹判書 大提學으로 召命했으나 不應하셨고, 宣祖元年 戊辰(1568)에 또다시 崇祿大夫 右贊成으로 召命받아 一時 出仕했으나 얼마 후 辭退하고 山林으로 돌아오시어 孔, 孟, 朱子學으로 儒宗에 推重되고 나아가 東方의 宗이라 稱하였다.
先生任께서 滿人의 推仰을 받게 된 것은 훌륭하신 儒學者로서 많은 後學弟子들을 가르치셨고 또 많은 著書를 남기셨기 때문이겠으나, 그에 못지않은 훌륭하신 人格으로 日常生活마져도 儉素하셔서 모든 이의 模範이 되셨기 때문에 더욱 빛났으며 萬人의 師表가 되셨다고 한다.
한가지 特記할 것은 先生任께서는 平素 梅花를 좋아하셨는데 어느 後學이 膳物로 傳하는 梅花盆을 下鄕하실 때 갖고 오셔서 書堂庭園에 심어 보셨다고 하는데 이로서 미루어 보면 先生任께서 梅花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고도 남겠다. 當時 先生任께서 심은 나무야 벌써 없어졌겠으나 지금도 書院뜰에는 크게 잘자란 梅花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뒷날 書院 再建立때 심은 것으로 보겠다. 또 先生任께서는 梅花에 對한 詩 한 首를 남기셨으니 다음과 같다.
   億陶山梅~도산매화를 생각하다
 湖上山堂 幾樹梅...호수위 도산서당 몇 그루 매화꽃이
 逢春延佇 主人來...봄철을 맞이하여 주인오길 기다리네
 去年己負 黃花節...지난해 가을에는 국화시절 버렸으니
 那忍住 期負回  ...아름다운 그기약 어찌차마 또버리랴!


(三) 先生任의 思想


 先生任은 나라의 부름을 70余回나 辭讓하셨고 그 學文은 孔,孟,과 朱子學問 및 그 理念에 基礎하셨고 나아가 우리 겨레의 精神的 師表가 되셨다고 하겠다.
때문에 歷代 儒學者들도 先生의 學風을 이어받아 “修己治人”이라하여 ‘“몸을 스스로 다스리고 나서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했으며, 王朝에서도 先生의 聖學十道를 根據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基本으로 삼았다 한다. 이와같이 先生의 맑고 바르며 크고 높은 精神과 學風은 온 나라에 퍼졌다 한다. 또 先生의 生活哲學은 “眞理는 理論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生活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시며 “知와行”의 差異를 說하셨고 그 基本이 되는 것이 “誠”이요 그에 대한 努力으로 “敬”이 있을 뿐이다.고 하셨다 한다. 또 理氣二元論的인 主理論은 理로서 氣를 다스려 人間의 善한 마음을 간직하여 順하고 바르게 살아가고 모든 事物을 順理로 運營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四) 先生任의 墓所


宣祖3年 庚午(1570)에 享年70으로 돌아가시니 栗谷 李珥先生께서 祭文을 지어 哭하시고, 宣祖에게 속히 諡號를 내려주시기를 請하므로서 바로 諡 文純이라 하고 領議政을 追贈하고 文廟(孔子位牌를 모시고 祭祀올리는 祠堂)에 從亨했다. 特記할 것은 先生께서 下世하시기 얼마 前에 親히 “退陶晩隱 眞城李公之墓”라는 名文과 名字를 써놓은 다음 親히 建立하신 “陶山書堂의 암여헌”에서 고요히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墓는 宗宅이 있는 곳에서 南쪽으로 約 1km거리의 土溪里 건지산 南麓 봉우리 위에 있고 道路에서 約 150m높이인데 墓前에 오르기 까지 急한 경사지라 올라가기 편하게 階段이 設置되어 있다. 墓庭에는 具石儀 된바 墓碑前面大字는 先生任 親筆인 “退陶晩隱 眞誠李公之墓”라 했고 碑文은 弟子 奇大升(幸州后人으로 字는 明彦이고 號는 高峰인데 中宗22年 1527年 生이고, 宣祖5年 壬申1572年에 卒한바 明宗朝에 大司成 大司諫을 歷任한 先生任의 弟子)이 謹撰하고 글씨는 韓石峯이 쓰셨다 한다.
註) 우리 두 사람은 墓前에 이르러 敬虔한 마음과 姿勢로 再拜 올려 省墓했다.


(五) 書院內의 各 建物들


가) 典敎堂 (寶物 第210號)
  正面 높은 곳에 “陶山書院” 이란 宣祖賜額 懸板이 걸려 있는 書院 中央에 位置한 主 建物로서 넓은 大廳에는 當時 스승과 弟子들이 함께 모여 學文을 講論하던 곳이라 하는데 懸板글씨는 韓石峯이 섰다 한다,
나) 隴(농)雲精舍
  弟子들의 寄宿舍로 東便마루를 時習齋라하고 弟子들의 休息空間인 西便마루는 觀瀾齋라 했다 한다.
다) 光明室
  書庫로서 東西로 2個棟인데 建物을 높게 樓閣型으로 建立된 것은 濕氣 防止를 爲함이며 懸板은 先生任의 親筆이라 하다.
라) 博約齋와 弘毅齋
  儒生들의 居處인데 두 建物이 서로 마주 對하고 있다.
마) 尙德祠
  書院의 上段部에 位置하는데 先生任 位牌를 奉安하고, 또 弟子인 月川公 趙穆의 位牌가 함께 모셔저 있는데, 月川公은 先生任 곁에서 오로지 學問에만 專念했었으며,  스승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先生을 代身하여 弟子들을 訓育한 秀才였었기에 이곳에 位牌를 모시고 每年 春秋(陰 2月과 8月中 丁日)에 儒林祭로 享祀를 지낸다.
바) 藏板閣
  여기에는 많은 木版本과 宣祖御筆, 先生의 文集, 遺墨, 言行錄等 많은 文獻과 木板等 2,790点이 保管되고 있었으나, 2003年 5月에 韓國國學振興院으로 移管되었다고 한다.
사) 典祀廳
  尙德祠에서 祭祀를 지낼 때 그 祭需를 작만하여 두는 곳으로 祭需廳과 酒庫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아) 守直舍
  書院을 管理하는 守護人들의 살림집으로 쓰이는 上,下 2棟이 있다.
자) 亦樂書齋
  號 芝軒公 鄭士誠등 뜻있는 後學 弟子들이 세운 建物인데 많은 書籍들이 保管되어 있었다. 懸板은 先生任의 親筆이라 하다.
차) 試士壇
아곳은 現在 安東湖內에 있는데 平素 先生任을 欽慕하시던 正祖께서 先生任의 學德을 기리고 선비들의 士氣를 높이기 위하여, 正祖10年 壬子(1792)에 御命으로 特別科試인 陶山別科를 보이던 곳인데, 當時 7,228名이 應試했고 그中 11名을 正祖께서 直接選拔 했다 하는데 그 案內板에 依하면 흐르는 강물에 흙이 流失되어 지금은 마치 작은 섬이되고 말았다고 한다.
카) 玉振閣
  先生의 重要遺品을 保管하기 위하여 1970年에 새로 建立된 것인데 建坪이 192,9평방메터의 遺品展示館으로  遺品은 다음과 같다.
書兀(올), 玉書鎭, 梅花硯, 案席, 靑藜(려)杖, 投壺(호), 白磁唾壺, 硯匣, 莞席, 黑端硯, 言行錄, 陶山十二曲, 自省錄, 三經釋義, 師門手簡, 講會錄, 先生手蹟, 御制跋文, 近思錄, 啓蒙傳疑, 聖學十道, 遺墨 等78点이고 遺墨中 三字式 四行으로 된 것으로,
  毋不敬(무불경)~ 人間이 行하는 모든 것은 恭敬의 對象이다.
  愼其獨(신기독)~ 홀로 있을 때야 말로 더욱 삼가라,
  毋自欺(무자기)~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思無邪(사무사)~ 奸邪하고 邪惡한 생각을 하지 말라, 라는 先生任의 親筆遺                    默中의 하나이다.
타) 宗宅 (地方 記念物 第42號)
書院에서 東北方으로 約 2km거리에 先生任의 宗宅이 있으니, 先生께서 50歲때 이곳에 卜居하시고 그後 지금까지 後孫들이 代代로 살고 있으며 正面에는秋月寒水亭의 懸板이 걸려있다.
파) 弟子들 中 特히 들어난 人物
  數많은 弟子들 中 特히 世上에 잘 알려진 人士 몇분.
  1) 樂圃  鄭  琢    1526~1605   明宗朝 左議政
  2) 高峰  奇大升    1527~1572   明宗朝 大司諫
  3) 鵝溪  李山海    1529~1609   明宗朝 領議政
  4) 鶴峯  金誠一    1538~1593   宣祖朝 右道監司
  5) 西厓  柳成龍    1542~1607   宣祖朝 領議政
  6) 寒岡  鄭  述    1543~1620   宣祖朝 大司憲.
追記) 鄒(추)魯之鄕碑
 書院으로 가는 進入路 中間地點에 있는 瓦碑로서, 이는 公子의 77代孫인 孔德成 博士가 1981年에 書院에 參拜한뒤, 마치 公子와 孟子가 살던 魯나라와 鄒나라에 比喩할수 있다는 뜻으로 親筆로 “鄒魯之鄕”의 글을 주셨는데 이를 記念한 碑이다.


(六) 見學後記


平素 公記錄에 依하여 약간의 事前知識이 있기는 했으나 實際로 參觀해 보니 數많은 建物들로 그 雄大한 規模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境內의 淨化 또한 잘되어 모든 것이 完全해 보였다. 文化財 管理當局과 保存委員들의 努力과 精誠을 알 수 있었다. 貴中한 文化財는 우리 모두가 各其 아끼고 所重히 여겨 後代에 傳해야 되리라!. 그리고 觀光客 中에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온 젊은 夫婦들과, 서로 戀人 사이 인듯 한 젊은 男女가 많았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한 現狀이라 하겠다. 建物마다 懸板이 걸려있기는 했으나 難解한 漢文이라 비록 그뜻을 잘 알수 없다 하더라도 그 外形만 살펴보면 貴中한 우리 文化財임을 모두들 느꼈을 것이니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 文化財는 우리들 스스로가 所重히 생각하고 잘 가꾸어 後代들에게 傳해야 될 것이라 秋毫도 毁損치 말아야 할 것이다.
追記 (孤山書堂) 
慶山市街를 가로질러 흐르는 南川江邊을 따라 散策路를 造成했는데, 그 끝나는 곳에서 다시 農路를 따라 2km程度 더 나아가면 바로 大邱市 壽城區 城東마을 뒷산 東麓인데 여기에 規模는 크지 않으나 孤山書堂이 있으니 市에서 淨化補修하여 깨끗한 講堂 1個棟과 附屬 建物 1個棟뿐이라 지금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초라하고 閑寂한 狀態이다. 그러나 庭園에는 案內板도 있으며 講堂뒤의 空閑地에는 오래된 듯 한 큰 瓦俾가 있었으니 碑文에 依하면 옛날에는 많은 儒生들이 修學한 곳으로 常勤하는 訓長이 있었으며, 또 巨儒이신 退溪先生께서도 때때로 오셔서 講論하셨기에 많은 儒生들이 모여 들어 큰 盛況을 이루었으며 또 先生任께서는 講堂뒤 空地에 느티나무를 紀念植樹하셨다, 하는데 지금은 그 나무가 超巨木으로 잘 자라 두터운 그늘을 만들고 있다. 正確한 年度는 記憶치 못하나 8~9年前에 慶山市로 移住 後 散策으로 가끔 들려 살피며 느낀 것은 그 옛날 멀고 먼 곳인 安東에서 이곳까지 後學들 訓育講論次 여러번 오셨다는 碑文 內容을 살피고, 先生任의 後學敎導를 爲한 높은 뜻에 感銘받아 先生任을 欽慕하는 마음으로 언제인가에는 꼭 한번 先生任 墓에 省墓라도 올려야 되겠다는 作心하게된 契機가 되었더니, 지금에야 겨우 당시 作心한바를 이루게 되었으니 多幸이라 하겠다.
                     
                              


 歲 癸巳 2013年 9月 25日
大邱宗會 常任顧問 淸泉   斗  烈   拔萃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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