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魯 崗 書院 紀行 류두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18 15:54:07       조회수 : 407 파일 :

所在地 忠南道 論山市 광석면오강2리산1~3
                             忠南道 記念物 第20號


(一) 槪要


오늘의 日程을 생각하여 아침 일찍 出發하여 午前中으로 紀行을 마치기로 하여 午前10時頃에 그 所在地인  광석면에 到着하였다. 書院앞에 다다르니 큰 道路와 약간의 空地를 이용하여 넓지는 않으나 駐車場이 있었고, 書院入口에 乙卯(1975)3月에 地域 儒林에서 그 書院에 配享되신 四賢(公父子三公과 孫子)께서 配享되신 內容을 알릴 수 있는 큰 事蹟碑를 세울 것을 合議하고 庚辰(2000)에 큰 碑를 세웠다. 進入路 入口에는 큰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外三門까지 가는 길 양쪽에는 民家들과 田地가 있어 어찌 길목을 淨化치 못했는지? 아쉽기도 했다. 外三門 앞에는 案內板이 있기는 했으나 內容은 疏略하여 깊은 內容은 알 수 없었다. 管理人의 설명에 의하면 十數年前에 一部를 補修했다고 한다. 外三門을 들어서니 넓은 庭園에는 雜草 한포기 없이 깨끗했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는 管理人이 두 사람 있었고 管理室은 없다고 한다. 西齋인 經誦齋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案內文은 없다고 했다.


(二) 院內 各 建物들


1) 外三門
  外部 進入路에서 몇 계단 높은 자리에 位置했는데 앞서의 說明과 같이 十數    年前에 一部分을 補修했다고 한다.
2) 東齋와 西齋
  두 建物이 다 같은 크기의 三間建物로 서로 마주대하고 있는데 다 같이 儒    生들의 修學과 休息處라 했다. 東齋의 屋號는 頌德齋라하고, 西齋는 經頌齋    라 했는데 懸板이 各 齋에 걸려있었다.
3) 講堂
  庭園 中央部에 雄壯하게 講堂이 있었는데, 처마 높다랗게 魯崗書院이라는 큰    懸板이 걸려있었고, 內部에는 東西쪽에 各 한間 程度의 溫突房이 있었고 中    央 大廳 三面에는 크고 작은 縣額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講堂처마에    는 龍머리 모양을 한 木刻 數十個를 둘러 부처 裝飾해 놓은 것이 特異하다.    講堂左側 가까운 庭園에 書院에 대한 簡略한 內容과 由來를, 務安 后人 박주    철 撰과 坡平 后人 尹汝益 謹書로 己卯(1999)中秋 上浣에 세웠다는 院庭碑    가 있었다.
4) 崇義堂 (祠堂)
  講堂 뒷편 높은 자리에 內三門이 있고 안쪽 낣은 자리에는 祠堂인 崇義祠가    있었는데 門이 잠겨저 있었다. 뜰 안에 있는 案內板에 의하면 本 祠堂에는     諡 文正公을 主壁으로 모시고, 從向에는 ㄱ) 尹宜擧(1610年生~1669年 卒~    公의 長子)와 ㄴ) 尹文擧(1630生~1696年 卒~公의 次子) 및 ㄷ) 尹拯(1629    生~1714年 卒~公의 孫子로 尹宜擧의 子)等이다.
5) 取水場 建物(우물)
  取水를 위한 揚水機 保管建物인데 近年에 補修하면서 古典的 建物로 再建된    것이라 한다.
6) 담장
  書院 周圍 全體를 돌담장으로 둘렀는데 一見하여 깨끗하고 시원해 보여 書    院을 한층 더 돗 보이게 했다.


(三) 然故地


본 故莊에 書院이 建立된 緣由는 本 광석면내에 公의 後孫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 緣由가 되어 書院이 建立되었다는 說明이다. 또 管理人의 說明에 의하면 數年前까지는 郡記念物로 있었으나 近年에 와서 道記念物로 昇格 指定되었다 한다. 그 後 부터 當局의 關心과 配慮가 달라져 來年에는(2015) 書院앞의 民家들을 收用하는등 넓은 駐車場도 造成할 計劃이라 한다.


(四) 諡 文正公 尹煌 事蹟


公은 坡平 尹氏 后로 諱 昌世의 아드님으로 宣祖4年 辛未(1571)에 태어나시고 號는 八宋이라 했으니 牛溪公 成渾의 女婿인데 그 聘父이신 牛溪公을 스승님으로 修學하여 宣祖30年 丁酉(1597)에 謁聖試 乙科 第一人으로 及第하여 出仕하시니 承文院 正子를 거처 兵, 禮, 刑曹佐郞을 歷任後 水原判官일 때 仁祖께
서 卽位하신 後 掌令, 執義, 大司諫等을 거처 全州府尹에 就했다. 仁祖2年 甲子(1624)에 李适(1587年生~1624年 卒)이 反亂을 일으키니 檢察使 李貴(1551
~1627)가 職을 버리고 逃亡가거늘 이를 論罪하여 罰할 것을 主張하고, 또 平安道觀察使 尹暄(훤)(~1630年 卒)이 城을 버리고 逃亡하였으니 論罪하여 斬하도록 했었다. 仁祖5年 丁卯(1627)에 蒙古軍의 侵入으로 일어난 丁卯胡亂때는 司諫으로서 朝廷에서 和議코자 함에 이를 極力 反對하고, 主和派의 降將인 姜弘立(1560~1627年 卒)을 罰하기를 强力히 主張하고, 同15年 丁丑(1637)에 和는 卽 降伏이라며 斥和를 主張하니, 仁祖께서 크게 怒하시며 公을 投獄코자 하였으나 政院에서 容恕하시기를 諫하여 免罪되었다. 丙子胡亂때 淸陰公 金尙憲(1570生~1652卒)과 桐溪公 鄭蘊(1569生~1641卒)等이 斥和臣으로서 自首하여 蒙古에로 連行된다는 傳言을 듣고 크게 놀라며 위 두분을 代身하여 自身이 가겠다고 청했으나 받아드리지 않고 結局은 丙子 三學士들만 連行되어 殉節하셨다. 公께서 끝까지 斥和를 主張하시다가 끝내는 仁祖17年 己卯(1639)에享年69歲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文政公이라 諡號하고 贈 領議政 되셨다.


(五) 諡 文敬公 尹宜擧 事蹟


公은 前項의 諡 文正公의 아드님으로 光海君2年 庚戌(161)에 태어나시고 號는 美村 又號 山泉齋라 했으며, 牛溪 成渾의 外孫이다. 일찍부터 愼獨齋 金集門下에서 修學하여 仁祖11年 癸酉(1633)에 進士에 오르고, 遺逸로서 王子의 師傅와 여러 官職을 거쳐 뒷날 元子 講學官으로 召命되었으나 不就하고, 仁祖14年 丙子(1636)에 淸나라에서 使臣을 보내옴을 보고 後學들과 같이 上疏하여 使臣을 斬할것을 請하였다. 그해 12月에 胡亂이 일어나자 母親과 家族들을 同伴하여 江都로 避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江都가 陷落되어 同志들은 殉節했으나 公은 빠저나와 無事했는데 그후 부터 公은 이를 平生토록 부끄럽게 생각하고 科試에도 應하지 않고 오로지 性理學에 專念하였다고 한다, 著書는 文集12권이 있으며 뒷날 顯宗10年 己酉(1669)에 돌아가시지 나라에서 文敬公이라 諡號하고 魯崗書院에 考位와 함께 從享되셨다.


(六) 諡 忠敬公 尹文擧 事蹟


公은 諡 文正公의 아드님이시고 諡 文敬公의 아우로서, 仁祖8年 庚午(1630)에 태어나시고, 牛溪 成渾의 外孫으로 成長後 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召命했으나 모두 辭하고 不就했으며 오직 朱子學에 深就했었다. 丙子胡亂(1636)때는 考位를  따라 南溪에 扈駕하였고 뒷날인 肅宗25年 己卯(1699)에 享年 67歲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忠敬公이라 諡號하고 魯崗書院에 考位와 함께 從享되셨다.


(七) 諡 文成公 尹拯(정) 事蹟


公은 諡 文正公의 孫이며 諡 文敬公 號 美村 諱 宜擧의 아드님으로 仁祖7年 己巳(1629)에 태어나시고 號는 明齋라 했다. 成長하심에 愼獨齋 金集門下에서 修學하고, 또 兪市南에게 性理學을 修學하고, 또다시 尤庵 宋時烈에게 授業하여 뒷날 洪州에 築室하여 屋號를 敬勝이라 扁號하고, 道義를 後代들에게 講論하기도 했다. 丙子胡亂 다음해인 仁祖15年 丁丑(1637)에 江華가 陷落될 때 어머니 李氏께서 殉節하시니 이를 恨하여 平生토록 科業을 廢하고 벼슬도 願치 않으셨다. 肅宗께서 召命했으나 나아가지 않으셨고, 또 뒷날 參判, 判書, 大司憲, 右議政으로 召命했으나 모두 辭하고 不就했었다. 이와같이 거듭하여 不就했었는데 王의 龍顔도 보지 못한체 三公의 벼슬을 받고도 不就하신분은 公外 다른 분에게는 그 例가 없었다고 한다. 原來는 尤庵 宋時烈과는 師弟의 誼를 맺었으나 뒷날에는 서로 政派가 달라 尤庵은 老論派의 領袖가 되고, 公은 少論派의 領袖가 되어 서로 갈라서니 前日과는 다르게 언제나 論爭을 거듭했다고 한다. 오랜 뒷날인 肅宗40年 甲午(1714)에 享年 85歲로 卒하시니 文成公이라 諡號하고 後學들이 “龍溪書院”을 세워 公을 配享하고 또 考位와 같이 魯崗書院에 從亨되었다.


(팔) 끝 맺음


以下는 앞서 本文에서 言及한 것이라 말씀이 重複되기도 하나 本書院만의 特異한 內容은 一家 四賢士가 함께 配享되셨으니, 卽 아버지인 公을 비롯하여 아드님 두 분과 孫子가 主壁과 從亨으로 配享된 곳은 아마도 이곳 뿐일것으로 보겠다. 또 管理人이 두 사람이 있어 넓은 境內는 雜草한포기 없는 깨끗함이 었다. 듣는바에 의하면 來年에는 書院入口의 많은 民家들을  收用 撤去하고 넓은 廣場이 造成될것이라 하니 많은 觀光客이 붐빌것으로 기대도 된다.
이상 亂筆의 拙稿를 줄이고 이미 論山까지 왔으니 이 附近에 있는 彰烈祠에로 갈 計劃이라  속속히 떠났다.

 

 

 

  歲  甲午 2014年 9月

  大邱宗會 常任理事 淸泉   斗  烈   拔萃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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