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鷺 江 書院 紀行 류두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18 15:30:57       조회수 : 410 파일 :

所在地京畿道 議政府市 장암동산146-1
                                     京畿道 地方記念物 第41號


(一) 槪要


그 동안 甚한 暴炎과 身病으로 中斷했던 賜額書院 紀行을 마무리 하고자 秋夕 連休 後 다시 움직여 본다. 먼저 議政府市 所在의 鷺(노)江書院을 찾았다. 鐵道와 地下鐵을 利用했기에 많은 旅費는 들지 않고 갈수 있어 多幸이었다. 書院入口에 到着하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三門앞의 超大型 홍살문이었고 또 三門 높다랗게 걸린 鷺江書院이란 大型 懸板이었다. 三門을 들어서니 거리 넓지 않은 庭園에 東西齋가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案內板에 의하면 이곳은 儒生들 修學과 休息하는 곳이며 西便의 庫直舍는 祭器등 備品들의 保管 倉庫라 했다. 그上段의 약간 높은 곳에 公을 配享한 祠堂이 있었는데 祭祀는 年2回 陰2月과 3月中 丁日에 宗中에서 올린다고 한다. 特記할 것은 庭園內 遮光網을 치고 그 밑에 몇 개의 倚子가 놓이고 年老한 분들이 談笑하고 있었다. 서로 人事를 하니 모두들 後孫들로서 80歲 以上이라 했다. 나의 訪問의 事由를 물음에 紀行事實을 간단히 說明도 했다. 그중 座上인듯한 분이 점심은 했느냐고 하기에 아직 때가 덜되었다고 했더니 그분이 東齋로 가셔서 점심준비를 해 와서는 이것이라도 요기하시라고 권한다. 그러나 고맙지만은 잇몸이 탈이 나서 먹을 수 없노라 사양했다. 約2~30分間 對話해보니 그분들은 나이가 있으니 할 일도 없어 消日 삼아 거의 每日같이 나와 놀며 풀도 뽑고 淸掃等도하며 서로 돈독한 情談도 나누고 祖上님의 事蹟도 살피고 점심도 이곳에서 간단하게 먹는다고 했다. 그중에서 여러가지 事項을 설명하여 주는 이는 公의 10代孫인 年81歲의 朴贊主라고 自己 紹介를 했다. 그리고 案內文을 보니 公의 墓所가 標記되어 있기에 位置를 물으니 10分 程度 올라가면 있다는 말에 公墓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贊主씨가 가까운 거리의 水落山중턱에 있으니  나중에 案內하겠다고 했다. 넷분들의 崇祖하는 마음씨와 姿勢에 깊은 感銘을 받았다. 참으로 대단항 분들이라고 생각 되었다.


(二) 鷺江書院 (地方記念物 第41號)


本 書院은 諡 文烈公 朴泰輔를 配享한 곳인데, 公은 肅宗의 后妃이신 仁顯王后를 肅宗께서  禧嬪張氏의 奸計에 속아 廢黜코자 하실 때 極力 反對한 罪로 王의 甚한 拷問 끝에 珍島로 流配되어 流配地로 가는 途中 果川에서 돌아가셨는데, 肅宗21年 乙亥(1698)에 公께서 돌아가신 그곳 果川에 公을 配享키 위하여 書院을 建立하였으니, 그 規模가 대단히 컸다고 하며 同24年 丁丑(1697)에 趙윤백등 많은 儒林들의 請으로 나라에서 鷺江書院이라고 賜額되었다고 한다.
그후 英祖께서 甲戌(1754)에 다시 重修했으나 六,二五때 完全 燒失되었는데, 뒷날인 1969年에 公墓所와 祖上님들의 集團化된 墓域이 造成되고, 또 公의 宗宅과 祠堂이 있는 이곳에로 移建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事情으로 果川때와 같이 크게 復元치 못한 것이 아쉽다고들 입을 모았다.


(三) 諡 文烈公 朴泰輔 事蹟


公의 事蹟 說明은 2013年12月18日附의 德峰書院紀行文에서의 紀錄 參照바람,
여기서 說明치 못한 內容만 追記해 본다.
가) 公은 그의 叔父이신 諱 世垕에게 養入되었다.
나) 流配途中 돌아가셨다는 果川은 現 서울시 鷺梁津이다.
다) 公의 漢詩가 전해지니 다음에 옮겨 본다.
  風雨年年 滿古臺(풍우년년만고대)  해마다 비바람 언덕위에 몰아치고
  君主不復 賞花來(군주불복상화래)  임금님은 영영 꽃구경하러 오지못하구나
  千秋過客 傷心地(천추과객상심지)  천년토록 나그네들 이곳에 슬퍼하니
  莫遺殘芳 近水開(막유잔방근수개)  꽃들아 강기슭에 무심히 피지마라
라) 肅宗3年 丁巳(1677)에 公께서 禮曹佐郞일 때 試官으로서 出題를 잘못했다    는 南人派들의 彈劾을 받아 宣川으로 流配되었다가 뒷날 放免되다.
마) 坡州郡守로 在職시 朝廷에서 牛溪 成渾과 栗谷 李珥의 位牌를 文廟에서 빼    버렸는데 坡州에서는 그 位牌를 빼지 않고 그대로 存續시켰는데 이로 인하    여 朝廷 指示에 따르지 않았다고 引責免職當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바) 公의 善政碑가 肅宗28年 壬午(1702)에 新安郡 一帶를 暗行御史로 活躍하    실 때 恤民善政碑를 珍島邑 자동리에 세웠는데 이후로 이곳에 또 郡守等 다    른 善政碑도 세워졌다고 한다,


(四) 公의 墓所


書院의 左側野山인 水落山에는, 公의 生父이신 西溪公 諱 世堂의 墓를 비롯하여, 公墓와 叔父로서 養父인 諱 世垕의 墓와 養子의 墓가 차례로 造成된 一家들의 集團墓域이라는 說明을 듣고, 朴贊主씨의 案內를 받아 一圓을 둘러보고 公墓에는 再拜도 올렸다. 下山하여 마을 입구까지 내려와, 더 넓은 空 敷地의 제일 안쪽으로 公의 祀堂과 齋室이 있었고 북쪽 끝에는 宗家로 住宅이라 했다. 朴氏가 宗孫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나와 人事시켜 주었는데 젊은 사람이었다. 朴氏는 다른 일이 있다며 돌아가고 나 또한 電鐵을 타기 위하여 큰 길로 나오니 그 宗孫이 배웅해 주었다.


(五) 끝 맺음
公의 事蹟을 살펴보면서 特히 感銘깊었던 것은, 忠誠은 勿論이며 平素에 옳은 일에는 그 所信을 굽히지 않고 推進해 나가시고, 派爭으로 數次 免職 또는 流配당하셨다고 전해지며 또 그 直孫들 몇 사람이 書院에 나와 雜草와 淸掃등으로 崇祖와 敦睦을 實踐하고 있음을 보고 그 誠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崇祖함이 別것이겠는가? 80後半의 老人들로서 祖上의 祠堂이나 墓所에 나와 雜草를 뽑고 周圍를 깨끗이 淸掃하는 것도 崇祖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歲  甲午 2014年 9月 15日
大邱宗會 常任理事 淸泉   斗  烈   拔萃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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