所在地 京畿道 安城시 德峰里108
(一) 槪要
肅宗朝에 旌閭(정려)를 받은 諡 忠貞公 號 陽谷 吳斗寅을 配享한 祠宇인데, 入口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祠宇에 오르는 階段 앞 庭園에는 乙酉(2005)春節에 月城 李鍾宣 撰의 大型 記蹟碑가 세워져 있었다. 階段 위의 外三門에 들어서면 講堂인 큰 建物로 “正義堂”이 있고, 안쪽에는 內三門이 있으며 그 안쪽에 德峰祠宇라는 큰 懸板이 걸린 祠堂이 있었다. 祠堂 안 中央에는 큰 祭床과 位牌를 奉安한 櫝(독)(位牌函)이 있었다. 內三門 左右에는 東齋와 西齋가 서로 마주 對하고 있었다. 또 正義堂 右側에는 그리 크지 않는 公의 旌閭閣이 있는데 “忠臣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贈領議政 諡 忠正公...以下略”의 旌閭門의 內容이 길다란 木板이 걸려있고, 그下段에 “孝子 成均生員 吳觀周 之門”이란 旌閭門板이 英祖12年 丙辰(1736) 10月에 내려 졌다는 父子분의 旌閭門板이 한곳에 걸려 있었는데 이는 보기 드문 境遇라 하겠다. 그러면 아래에서 父子분의 身上을 簡略히 살펴보기로 한다.
(二), 諡 忠貞公 號 陽谷 吳斗寅 記事.
公은 海州 吳氏 后로 考位 諱 翔(상)의 아드님으로, 仁祖2年 甲子(1624)에 태어나시고 叔父의 后로 入籍되었다.
幼時부터 文才가 있었으니 仁祖26年 戊子(1648)에 初試에 合格하고 뒤이어 文科에 壯元하여 出仕하니, 司憲府持平을 配하고 여러 官職을 두루 歷任한 뒤 刑曹判書에 이르고, 淸나라에 가서 2年間 滯留한뒤 歸國하여 肅宗8년 壬戌(1682)에 京畿道 觀察使를 거쳐, 그 다음해에 다시 刑曹判書로 옮겼다.
肅宗15年 己巳(1689)5月에 仁顯王后를 廢하려 할 때 李世華와 朴泰輔等과 함께 不可함을 上疎하여 極諫하다가 王의 震怒를 받아 酷毒한 拷問끝에 死刑에 處하려했으나 減刑되어 義州로 流配되어 謫所로 가는 途中 坡州에서 돌아가시니 義士忠臣이라 하고, 坡州의 동계사를 비롯하여 四個處 祠堂에 配享되었다. 뒤날 忠貞公이라 諡하고 “忠臣의 旌閭門”이 내렸다. 또 肅宗20年 甲戌(1694)에 議政府 領議政에 追贈되었다.
膝下에 아들 兄弟가 있었는데 맏아들 觀周는 顯宗9年 戊申(1668)에 태어나고, 肅宗24年 丙申(1716)에 卒했는데, 號는 醉夢軒이라 하고, 肅宗의 따님인 明安公主와 結婚하니 淳昌尉에 封되었다. 특히 筆力이 대단하여 여러 곳에 그의 筆跡이 남아 있다고 傳해진다. 公은 平素에도 남다르게 孝誠이 至極 하여 孝友敦睦했다 한다. 同生인 郡守公 號 無爲齋 晉周는 文學家로 農巖 金昌協의 女壻라 하다.
(三), 李世華와 朴泰輔
吳斗寅과 뜻을 같이 했던 두 분의 身上을 다음에서 簡略히 살펴본다.
가) 李世華
公은 富平 李氏 后로 仁祖8年 庚午(1630)에 生하고, 號는 雙柏堂으로 27歲때 文科及第하고 出仕하니 벼슬이 累進하여 五道의 觀察使를 歷任하고 淸白吏에 오르셨다. 肅宗15年 己巳에 閔中殿의 廢位를 反對하며 極諫하다가 酷毒한 鞠問을 當하고 定州에 流配되었다. 뒷날 肅宗20年 甲戌(1694)에 王께서 甚했음을 感悟하시고 大司憲으로 召命했으나 不就하고 뒷날 閔中殿이 復位되고 난 뒤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吏曹判書에 이르고, 또 뒷날에는 耆社에 들고 肅宗 27年 辛巳(1701)에 卒하니 忠齋라 諡號하고 忠烈祠에 配享되었으며 旌閭門도 내려졌다고 한다.
나) 朴泰輔
公은 潘南 朴氏 后로 考位 西溪公 諱 世堂의 아들로 孝宗5年 甲午(1654)生으로 肅宗3年 丁巳(1677)에 謁聖試에 壯元하여 禮曹佐郞과 伊川縣監을 거쳐 暗行御史로 民情을 살피고 뒷날 坡州牧使에 赴任하였다. 그때 肅宗께서 嬉嬪 張氏의 誣告에 속아 閔中殿을 廢位하려 할 때 뜻을 같이 하는 數人들과 함께 이에 反對하며 極諫하다가 酷毒한 拷問을 當하고, 珍島로 流配되어 謫所로 가는 途中 果川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公은 36歲의 젊을 때였다. 이 所聞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痛哭했다고 한다. 뒷날 吏曹判書를 追贈하고 文烈公이라 諡號하고 豊溪祠에 配享되었다. 公은 學文이 뛰어나고 筆力 또한 大端했으며 著書로는 그의 號를 딴 定齋集이 있다 한다.
(四), 閔中殿의 策封
前記 三公들이 當한 禍의 根源은 肅宗의 閔中殿 廢位로 因함이니, 當時 宮中 狀況을 簡略히 살펴보기로 한다.
李朝實錄에 依하면 19代 王이신 肅宗은 顯宗의 元子로 康熙 14年 乙卯(1675)에 卽位하신 後 5年 己未(1679)에 成三問等 節臣들의 祠堂을 세우고 또 復官도 시키는 등 善政코자 했으나 그때 甚한 黨爭으로 큰 治積을 남기지 못했다. 처음 맞이한 仁敬王后 金氏(光城府院君 萬基의女)였으나 不幸하게도 肅宗6年 庚申(1680)에 돌아가시고, 后妃를 揀擇(간택)하게되어 먼저 初揀擇에서 5名의 閨秀를 選拔하고 얼마 후 5名의 閨秀가 再揀擇場에 나와 자기 아버지 이름이 적힌 방석에 차례로 앉기로 되어 4名은 各己 自己들의 자리에 앉았으나, 閔閨秀 만은 방석에 앉지 않고 맨바닥에 앉았다. 內殿의 여러 윗 殿들께서도 나와 각 閨秀들과 簡單한 對話를 나누며 사람 됨됨이와 心性을 살피는데 大妃께서 “閔閨秀는 어찌 방석에 앉지 않고 맨자리에 앉았는가?” 고 물으시니 그 對答이 “方席에는 제 아비의 啣字가 적혀 있으니 어찌 方席에 앉겠습니까?”고 했다. 이에 윗殿 어른들은 더 以上 물을 것 없겠다며 閔閨秀가 揀擇되어 肅宗7년 辛酉(1681)에 中殿으로 策封되었다.
(五), 禧嬪 張氏의 誣告
肅宗께서는 禧嬪 張氏를 寵(총)愛했었다. 肅宗에게는 아직도 元子가 없었는데 禧嬪이 王子를 낳으니(뒷날의 景宗~肅宗14年 戊辰1688年 生) 더욱더 가까이 하며 寵愛하니 禧嬪의 氣勢는 眼下無人으로 큰 行勢를 했다. 점차로 慾心이 生겨 閔中殿을 廢位케 하고 스스로가 中殿자리에 오른다면 아들도 元子가 될것이며 온갖 富貴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끝에 갖은 術數와 奸計로 王을 說得하니, 禧嬪의 奸計에 속은 肅宗은 閔中殿의 廢位를 御前會議에서 諸臣들에게 問하니 不可하다는 諸臣들의 말을 듣지 않고, 禧嬪의 뜻대로 結局 肅宗15年 己巳(1689)에 閔中殿은 廢位되고 말았다.
(六), 閔中殿의 復位.
張禧嬪의 術數와 奸計로 閔中殿을 廢位시킨 뒤 自身이 中殿자리를 貪하여, 王에게 온갖 嬌(교)態를 다 부렸으나, 肅宗도 차차로 禧嬪의 奸惡한 心性을 알게 되어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 內殿의 윗殿에서도 王의 心中을 알게 되어 暗暗裡에 廢位된 閔心의 近況을 살핀 바 閔氏는 언제나 素服차림으로 杜門不出하며 勤愼中임을 알게 되었고, 또 市中 곳곳에는 自然 發生적인지? 어느 누가 지어 퍼트린 것인지? 는 알 수 없으나 아이들의 놀이 童謠에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다”는 童謠가 널리 퍼젔는데 미나라는 閔中殿을 이름이고 장다리는 禧嬪張氏를 이름이였다. 이 內容을 알게 된 윗殿에서는 民心들의 흐름을 참작하여 復位 시킬 것을 王에게 勸하니 內殿의 뜻을 받아들인 肅宗20년 甲戌(1694)에 閔中殿이 復位되게 되었다. 그 후 肅宗27년 辛巳(1701)에 禧嬪張氏는 그의 惡한 性品이 드러나 結局에 賜藥을 받게 되었는데, 받을 수 없다고 拒否하니 司令들이 억지로 먹이니 끝내는 죽었다고 傳해진다.
註) 以上과 같은 內容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宮中秘話이나 뜻하는 바는 사람은 누구나 그 心性이 어질고 착하면 끝이 좋게 잘 풀려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끝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天理로서 우리들에게 좋은 敎訓을 가르쳐 주는 內容으로 받아들인다.
(七), 끝 맺는 말
以上으로 賜額書院중 陶山과 屛山 兩 書院은 別稿에서 言及되었고, 그 외 10個所 書院을 차례로 見學한 바를 마무리 하면서 느낀 바는, 紀行文이라 본대로 적은 것이기는 하나 다시 뒤돌아보니 무엇이 빠진 듯 허전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자람이 많아서 좋은 글을 기대치 않았으나 좀 더 알찬 內容의 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지나친 慾心이랄까? 以外에 寧越 所在의 彰節書院에도 들리려 했으나 가지 못했음이 못내 아쉽기만 한데 언제 期會가 올지 모르겠다. 그래도 多少 慰安이 되는 것은 각 書院에 配享되신 先人들의 簡略한 事蹟들이라도 조금 알게 된 것은 큰 多幸이라 생각하며 이만 拙文을 줄인다.
歲 2013年 12月 18日
大邱宗會 常任顧問 淸泉 斗 烈 抄